9월 7일 나라시노 수용소는 인근 마을에 “조선인들을 내어 줄 테니까 받으러 오라”고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15명 받아 와서 각 구별로 배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일, 9일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해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을 받으러 오라고 한 것입니다. 다카쓰(高津)에서 6명(그 중 1명은 오사카(大阪)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오와다신덴(大和田新田)에서 3명, 가야타시모(萱田下)에서 3명, 가야타카미(萱田上)에서 1명, 오와다(大和田)에서 2명이 살해당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후나바시에서는 9월 6일 조선인 박해를 금한 계엄사령부의 비라가 배포되었지만 이들 희생자가 살해당한 것은 그 후였습니다.
현재 오와다신덴, 가야타 초후쿠지(萱田長福寺), 가야타 나카다이(萱田中台) 묘지, 다카쓰 칸논지(高津観音寺)의 네 곳에 공양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야끼가야 타에코((八木ヶ谷妙子)―그날 아침 종이 울렸다.
지진이 일어나고 며칠 지난 후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날 아침 종이 울렸습니다. 당시 그 종은 나무 사다리 위에 달려 있었는데 그 옆에 얼룩진 메리야스 반팔을 입고 볕에 그을린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사다리에 묶여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묶인 사람을 선두로 공동묘지까지10분 정도 흙길을 걸어갔습니다. 도착한 공동묘지에는 이미 구멍이 파져 있었는데 그곳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끌려 간 사람은 눈가림을 당해 그 소나무에 묶였습니다. 들어보니 사람들이 조선인을 어떻게 죽이는 것이 좋을지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사람은 총을 맞고 구멍에 매장되었습니다만 저는 너무 무서워서 그곳을 빠져 나와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간토대진재70주년기념행사실행위원회『この歴史を永遠に忘れず』)
기미즈카 쿠니하루(君塚國治)―부락 사람들이 처분해야 한다
사람도 너무 많고 소란을 피워 곤란하다고 하는 것을, 그러니까 야치요에서 각 자경단이 받아 온 거지. 받아 와서 이 밑의 하카데라(墓寺)에서 하룻밤 재워서 다음날 다 같이 의논을 했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부락마다 받아 온 부락 사람이 처분해야 했었지.
조선 놈들은 어떻게든 총으로 쏴 달라고 했었어…이 위의 묘지에 구멍을 파서 당사자들이 말한 대로 총으로 쏴 주기로 했어. 쏠 때까지 힘들어. 말로 하면 간단하게 들리겠지만 같은 사람인데 그들한테 심한 짓을 하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쏘는 사람도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다는 게지. 좀처럼 쏘지를 않는 거야. 네가 해라, 그쪽이 해라…결국 사용 허가를 받은 총을 가진 사람이 하게 되긴 했지만…
(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이상 자료제공 -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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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하(拂下)된 조선인
김종수(1923한일대질시민연대 대표)
재일동포 오충공(62) 감독이 두 편의 '간토(関東) 학살' 다큐를 제작했다. 첫 번째 작품이 1983년에 제작한 '감춰진 손톱자국'이고 두 번째 작품이 1986년에 제작한 '불하(拂下·내어주거나 팔아넘김)된 조선인'이다. 두 번째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오늘 게재한 지바현에서의 학살과 그 진실을 추적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일본 정부는 경찰, 군대, 민간자경단까지 동원된 학살의 양상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서서히 국가책임을 민간에게 돌리려는 음모로 수용소에 가두고 있던 조선인들을 민간 자경단에게 내어 주었다. 기록에 의하면 지바현 내 나라시노수용소에서 다카쓰(高津), 오와다신덴(大和田新田), 가야타시모(萱田下), 가야타카미(萱田上), 오와다(大和田)의 민간자경단들에게 조선인들을 받으러 오라고 하였다.
'사람을 데려가라'고 말하지 않고 사람을 '받으러 오라'는 말의 의미 속에는 조선인을 생명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야끼가야 타에코(八木ヶ谷妙子)선생님과의 운명적 만남
이렇게 불하(拂下)된 조선인이 학살되는 현장을 목격한 야끼가야타에코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은 2006년 한일청소년캠프를 도쿄에서 개최할 때였다. "역사를 써가는 아이들이 되자"는 슬로건으로 진행된 이 캠프에 한국, 일본, 재일코리안 청소년들이 참여하였다. 두 번째 날에 야끼가야타에코 선생님을 모시고, 간토학살목격자로서 아이들에게 특강을 부탁드렸다. 전직 교사로서 10세에 목격한 당시의 끔찍한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라는 내용이 주된 것이다. 강의 후에는 한국에서 온 10세의 어린이에게 각별한 눈 길을 주었다.
야끼가야타에코 선생님은 그 어린 나이에 학살을 목격하고 밤마다 죽어가는 조선의 청년이 꿈 속에 나타나 힘들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늘 도망치다가 꿈에서 깨는 일이 반복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교사들이 자신의 집으로 놀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재일조선학교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 내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상황을 듣다가 1923년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그 조선인 청년의 상황이 겹쳐지면서 가슴을 짓누르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9월, 간논지(관음사)에서 열리는 조선인피학살자 추도식에서 처음으로 학살의 목격담을 증언하게 되었다.
간토피학살자를 추모하며 떠난 첫번째 순례여행
야끼가야타에코 할머니의 증언은 지바지역에서 일본 군대와 민간자경단이 연계된 조선인학살의 또 다른 양태가 드러난 것이다. 우리는 조선인학살사건을 조사하며 피학살조선인을 추모하는 모임을 이끌고 계신 오오타케요네코 선생님과 히라카타치에코 선생님의 안내로 지바 다카쓰(高津)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2006년에 야기가야타에코 할머니를 만나고. 2007년 5월에 도쿄 신주쿠 고려박물관에서 개최된 패널전시회에 참가하여 송부자관장을 만나고, 그 패널을 빌려와 대한민국 국회에서 전시회를 열고, 11월에 첫 간토조선인학살사건을 공부하기 위한 현장투어를 한 뒤 바로 [관동조선인학살진상규명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를 도쿄에서 조직하게 되었다.
기나긴 세월, 단 한 문단의 국사교과서에서 만난 사건으로 기억되고 말았을 이 사건이 나에게로 들어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2006년 한일평화캠프에서 야끼가야타에코선생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꼭 캠프 때문만이었을까? 야끼가야 타에코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다른 어떤 상황으로든 이 사건과 대면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안타까운 일은 이 일에 참여한 지 15년 동안 간토학살사건을 알리고 추모하는 일에 힘써왔지만 위안부문제나 강제동원노동자의 문제만큼 이슈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곧 2023년이 되는 시기에는 어떤 형태로 이 사건이 한일관계의 새로운 과거사정리로 발화될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