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이주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일본의 '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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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이주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일본의 '敵'이 되었다.
  • 김종수
  • 승인 2020.03.18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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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바현(千葉県) 후나바시(船橋)에서 일어난 일

(위 자료 번역)
1923년 간토조선인학살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일본 지바현 후나바시에는 철도(현재 도부노다센(東武野田線)) 공사에 종사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해군의 송신소도 있었는데 소장은 조선인들의 습격이 두려워 원군을 요청하고 지역의 자경단에게 “두 번 물어봐서 대답이 없으면 총으로 쏴도 된다”고 하며 총을 건넸습니다. 조선인들에 대한 경계심은 순식간에 고조되었습니다.

여기에 가마가야(鎌ヶ谷) 등지로부터 조선인들의 집단이 호송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기병으로부터 자경단에 인수되어 학살당했습니다. 희생자는 38명이라고도 53명이라고도 일컬어지지만 인원수도 이름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외에도 지바현에서는 군대와 자경단에 의한 학살사건이 다수 있었습니다.

(우라야스(浦安), 미나미고토쿠(南幸徳), 마바시(馬橋), 아비코(我孫子) 등)

 

간토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

                    후나바시, 마고메 위령원(馬込霊園)                    간토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関東大震災犠牲同胞慰霊碑)
                    후나바시, 마고메 위령원(馬込霊園)                    간토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関東大震災犠牲同胞慰霊碑)
               「후나바시주변약도」 ×표시가 학살 사건이 있었던 지점               (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후나바시주변약도」 ×표시가 학살 사건이 있었던 지점               (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경찰,군대과 자경단에게 쫓기는 조선인초등학생의 기념화집(『太陽』1977년 2월호)실제 그림에는 오른쪽 상단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경찰,군대과 자경단에게 쫓기는 조선인초등학생의 기념화집(『太陽』1977년 2월호)실제 그림에는 오른쪽 상단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지명이 적혀 있다.
↑간도계엄령사령부의 전단:후나바시 시내의 한 집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 전단은 행정단위 말단인 구장에게까지 배포되었다. 그리고 후나바시에서는 두 번에 걸쳐 하늘에서 살포되었다. (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간도계엄령사령부의 전단:후나바시 시내의 한 집에 보존되어 있었다. 이 전단은 행정단위 말단인 구장에게까지 배포되었다. 그리고 후나바시에서는 두 번에 걸쳐 하늘에서 살포되었다. (지바현 추도・조사실행위원회『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이상 자료제공 -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간토대지진당시 학살당한 6,661인의 유족이 되어주세요. 지금, 바로!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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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이주노동자들이 느닷없이 일본의 '敵'이 되었다.

김종수 대표(1923한일재일시민연대)

 

농토를 빼앗긴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에서 이주노동자가 되었다.

일본 내에 조선인 이주노동이 현저히 증가하게 된 시기는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경부터 였습니다. 세계대전 탓에 유럽의 온 나라들이 수출을 멈추고 있을 때, 일제는 조선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빼앗고, 자영농을 소작농으로 만들고는 한 해동안 힘들게 지은 쌀의 7~8할을 소작료로 수탈해갔습니다. 조선의 청년들은 더 이상 농사짓고 살아가기 힘들어 고향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일본에서는 값싼 조선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에 조선의 젊은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군복을 만들고, 철도를 건설하는 현장으로 이주해 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도 열심히 하였고, 일본의 노동자들과 함께 일본의 자본가와 정부를 상대로 권익투쟁에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 노동자들보다 더 용감하게 맞서 싸워 일본의 공권력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매우 두려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서 조선이주노동자들은 가정과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범죄자가 되었다.  

경찰은 지진발생 후 떠돌아다니는 유언비어를 '조선인을 조심하라'는 벽보를 붙이며 사실화 하였고, 일본제국의 해군 장성은 유언비어에 대한 사실확인도 없이 군대의 송신망을 통해 각 부대에 '조선인을 색출하고, 반항도 아닌 두 번 물어봐서 대답이 없으면 총으로 쏴도 된다'고 전하고, 지역의 자경단들에게 총을 지급했다.

이러한 경찰과 군의 움직임을 재난상황에서 통제되지 않는 일탈행위라고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더구나 민간에게 총을 지급하는 결정을 해군 장성이 단독으로 무선송신망으로 방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상황은 계엄상황이기 때문이다. 

결국 계엄령에 따라 조선 이주노동자들은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지진과는 전혀 무관한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는 이주노동자에서 일본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재난을 대처하는 일제의 리더십은 내셔널리즘을 자극한 적개심 활용으로  

최근 아베가 보여주는 일본 리더의 리더십은 아베 개인만의 모습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부의 불만을 밖으로 돌려 전쟁을 벌여왔던 사무라이들에게서도 종종 익숙하다. 특별히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조선-한국을 정벌할 정당한 명분을 만들어 온 정조론, 정한론은 그 바탕에 내셔널리즘이 종교처럼 내재화되었으며, 국대국가 일본은 천황이 실제 신적존재와 인간의 존재성이 내재되어 있으며, 정교일치의 신정국가되 되었다. 신적존재가 내린 결정은 환전하며 모든 전쟁은 신의 뜻이었다. 신의 나라에 사는 신의 백성은 천황의 신민이었고, 신이 택한 백성이었다.
따라서 신의 국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모든 존재는 '비국민'이고, 천황의 뜻을 거역하는 존재는 모두 '제국의 敵이 되었다.

학살된 동포를 기억하며 세운 간토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関東大震災犠牲同胞慰霊碑)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연구자들이 동포들의 마음을 탁본하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김종수 상임대표)는 2017년 동북아역사재단에 추도비 채탁 프로젝트의 경비 일부의 지원을 신청받아 지바의 간토대진재희생동포위령비(関東大震災犠牲同胞慰霊碑)를 채탁하였다. 

탁본작업을 하기 위해 피학살조선인을 향해 묵념(2017)
탁본작업을 하기 위해 피학살조선인을 향해 묵념(2017)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의 간토피학살자추도비 채탁 프로젝트(2017)는 현장에서의 상황에 고려하여 계속 실시되어야 하며, 탁본은 [1923기억과평화관]에 전시될 것이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의 간토피학살자추도비 채탁 프로젝트(2017)는 현장에서의 상황에 고려하여 계속 실시되어야 하며, 탁본은 [1923기억과평화관]에 전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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