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발생과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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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발생과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 경계
  • 김종수
  • 승인 2020.02.1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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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군대, 민중이 확산시킨 유언비어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제공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제공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神奈川県相模原)만에서 매그니튜드 7.9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바현(千葉県)에서 시즈오카현(静岡県)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건물의 붕괴나 화재 등으로 인한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는 10만 5천명이라고도 일컬어집니다.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横浜)에서는 오전부터 “조선인들이 불을 지른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습니다. 유언비어의 확대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경찰, 행정 등을 관할하고 있던 내무성이었습니다. 내무성은 2일 오후 해군의 무선송신소에 전령을 보내 조선인들이 “불령”스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내용을 이튿날 전국으로 타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사이타마현(埼玉県)을 통해 관할 행정구역에 조선인들을 경계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선전하여 각 지역에 자경단이 조직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9월 3일 아침에 후나바시(船橋) 해군 무선송신소로부터 전국 현의 지사 앞으로 타전된 전문
9월 3일 아침에 후나바시(船橋) 해군 무선송신소로부터 전국 현의 지사 앞으로 타전된 전문

[전문의 내용]
9월 3일 오전 8시 15분 수신확인 
내무성 경보국장이 해군 기지 구레친쥬후(呉鎮守府) 부관에게 타전, 각 지방 장관에게 송신
 도쿄 부근의 진재를 이용하여 조선인들 중 각지에 불을 지르고 불령의 목적을 이루고자 현재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자들이 있다. 이미 도쿄부 일부에는 계엄령이 시행되어 각지에서 세밀히 시찰하여 선인(鮮人)들의 행동을 엄밀히 단속하고 있다.

 

[내용]
나는 미타(三田) 경찰서장에게 묻는다. 9월 2일 밤 “××이 습격해 온다는 전보와 주의사항을 귀하의 부하에게 받은 우리들이 자경단을 조직했을 때 “××을 보면 본서로 끌고 오라. 저항한다면 ○해도 상관없다”라고 친절하게도 귀하에게 들었다. 그 한 마디는 잠꼬대였는가. 아니면 증거가 없다는 것을 구실삼아 기억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인가. 어떠한가(시코쿠마치(四国町)자경단의 한 사람)

경찰이 민중에게 ×× (선인) 이 습격해 온다는 유언비어를 뿌리고 다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
『東京日日新聞』1923년 10월 23일자

 

[그림의 설명]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가 그린 유언비어의 이미지. 왼쪽은 폭탄과 권총을 숨긴 사회주의자 부부. 오른쪽은 임신부 시늉을 하며 배 안에 폭탄을 숨기고 있는 조선인 여성.

일본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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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만 없었더라면'

재일원로사학자 강덕상교수는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의 주최로 열린 심포지움에서 발표의 주제를 '계엄령만 없었더라면'이라 하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행정력으로만 재난을 대처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군대 등 모든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안심시키고 복구에 총력을 기울이려고 계엄령을 발포한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엄령 선포'는 국민안전과 재난복구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계엄령 선포의 요건들은 모두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이쇼 시대에 일본은 노동계와 학계에서 일고 있는 소위 반체제인사들과 조선에서 이주한 노동자와 유학생들의 연대가 점점 강고해짐에 따라 다이쇼 집권세력의 통치력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재지변으로 인한 화재와 시설들의 파괴가 제국 내 반체제세력들이 방화학고 폭파한 것이라는 거짓뉴스를 확산시켰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계엄령 선포의 합법적 근거를 만드려고 했던 것입니다.  

계엄령 선포는 국가비상시에 천황의 명으로 행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대일본제국헌법 제1장 천황, 제14조'에 '천황은 계엄을 선포한다. 계엄의 요건 및 효력은 법률에 따라 정한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923년 9월에 있었던 조선(한국)인에 대한 학살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계엄의 요건이 실제하지 않은 허위에 근거한 것이었기에, 일본정부는 지금이라도 당시의 계엄령 선포가 옳았는지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이 있어야 합니다.

 

'근거를 알 수없는 유언비어'는 역사왜곡의 산물

간토대학살이 '근거를 알 수없는 유언비어' 가 원인이라고 기술한 모든 역사기록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는 학살의 책임을 국가가 민간에게 돌리려는 역사왜곡의 산물입니다.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요건자체가 '(그런 일이 없었음으로)확인할 수 없는 허위'였기에 일본 정부가 법률을 어긴 것이고, 따라서 그로인해 피해가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당연히 국가(정부, 군대, 경찰, 민간자경단)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보통국가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1923년에 일어난 조선(한국)이주민을 학살한 모든 책임을 단순히 '유언비어에 현혹된 자경단'에게 들씌우고 국가는 아무런 책임을 져야 할 근거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근 아베총리는 1923간토조선(한국)인학살사건에 대한 근거가 없으므로 유감표명할 이유도 없다고 하고 있으며, 도쿄도 코이케 유리코도시사 역시 수년 째 피학살자들에 대한 유감표명을 거부해오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익세력들은 지금도 여전히 1923년 9월 간토대진재 당시에 일본 정부가 확산유포한 거짓뉴스를 그대로 믿고 있으며, 재난이 일어나면 인터넷을 통해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거짓뉴스를 생성하여 퍼트리고 있습니다. 

-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상임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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