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토대진재 조선인학살의 기록 - 도쿄지구병 1100가지의 증언
- 홍이표 목사 번역, - 한일재일시민 참여
永代橋·越中島 부근
K.S [당시 국철 직원]
[2일, 永代橋에서] 다리를 건너오자 다리 기와에 살해된 조선인의 시체가 있었다. 다리목의 파출소는 엉망진창으로 파괴돼 있었고, 조선인 6, 7구의 시신이 나뒹굴어 있었다. 목과 몸통이 떨어져 있었다. 일본도에 베인 것으로 보였다. 입고 있던 옷은 대개 양복이었지만, 얼굴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조선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차이가 없지만 당시에는 입는 것, 걸음걸이나 생김새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시신이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으며 얼굴도 크게 부어 있었다. 보통의 죽음, 이재(罹災)로 인한 죽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三原令『구술기록』→재일 한인역사자료관 소장)


T.S. [쓰키지 가치도키바시(築地勝鬨橋) 옆의 피해.1일 하마리큐(浜離宮)로 피신, 판잣집 만들기]
어두운 곳에는 어김없이 총잡이들이 활개를 치고 있어 “어디로 가느냐?” “소지품 검사!”아 같은 조사를 받았다. (중략) 조선인 소동도 일상 생활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열중한 이후부터는 한풀 꺾였다. 불이 켜지지 않는 밤이 계속 되어도 별일 없으니 도쿄 시내로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많았던 군인들도 할 일이 없어져서 곤란해진 탓이었는지, 박치 때리기도 할 일이 없었기에 조선인을 해쳤을 거라고 침착해진 사람들은 이야기 나누었다. 조선인의 시체도, 이재민의 시체도 뒤섞어서 상선학교 인근 매립지에 묻었다. 재건축 문제가 나중에 불거졌을 때, 요코야마 가쓰타로(橫山勝太郎) 대의사(代議士)가 문제 삼았지만. 주민들의 관심은 더이상 그런 데 있지 않았다. (三原令 『구술기록』 → 재일 한국인 역사자료관 소장)
우사미 마사에[宇佐美政衛, 재목상. 당시 후카가와 키바(深川木場)에 거주.]
하룻 밤이었다. 한밤 중에 “조선 사람 백 명이 몰려왔으니 모두 나와서 응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모두 자다고 있어서 다 일어날 것도 없이 나 혼자 나가서 봤다. 하지만 나는 (조선인이 쳐들어올 일은 없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당황하더라도 정도가 있다)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가보지 않을 수도 없어서 가 보았더니 과연 내 생각대로였다.
그 중 강물 속에 조선인이 셋만 있는데 맹렬히 권총 소리가 들려왔다. 재향 군인의 연등이 많이 보였다. 나는 권총을 쏘지 않도록 뗏목을 타고 보러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조선인은 없습니다, 또 몰려온다든가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안심하십시오”라고 당부를 한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왜 그런지 일본인들은 생각이 단조로워 금방 동요한다. 참으로 심지가 좁은 인종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후카가와 방면은 조선인의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죽인 것으로 보였고 그 수가 많았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런 곳에서도 사소한 일에 금방 소란을 피우고 흥분해 버리는 일본인의 당황한 모습이 발견되어 씁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