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학살의 증언과 기록, 한일시민이 함께 공동번역작업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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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학살의 증언과 기록, 한일시민이 함께 공동번역작업 시작
  • 김종수
  • 승인 2021.07.15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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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언이 전하는 사건의 피부 감각
- 가해(加害)의 역사를 직시(直視)하기


한일시민들이 간토학살의 1100개의 증언과 기록들을 함께 번역하면서

역사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평화적 시민연대를 공고히 하는

간토학살사건학습회가 매주 화요일 오후 4시에 줌을 통해 실시된다.

첫 모임에는 도쿄, 요코하마, 나고야, 후쿠오카, 기타큐슈, 서울, 천안의 시민들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며 니시자키씨의 서문과 아다치구에서의 학살증언을 번역하고 학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1923년 간토학살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어떻게 학살되었는지 생생한 증언을 듣고나 기록을 접한 경험은 매우 적을 것이다. 

일본과 한국의 민주시민들 역시 단순한 교과서 몇 줄의 사건에 관한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일본의 교육현장에서는 간토학살사건을 왜곡하거나 축소한 역사를 배우고 있으며, 한국의 역사교육현장에서는 단 몇 줄로 그나마 시험에 나오지 않기에 건너띄는 경우가 많다. 시민들이 읽을만한 대중서도 매우 적다. '학살'이라는 피부에 와닿을 끔찍한 고통이 거의 느껴지지 일없이 건조한 몇 줄의 말로 다 알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니시자키마사오씨는 대학생으로서 아라카와방수로에서 학살된 채 강변에 집단매장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모임에 참여하면서 시 사건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환갑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도 오직 간토학살의 진실을 맑히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으며, 시민들과 함께 세운 추도비를 지키며 자신이 직접 수집한 간토학살의 증언과 기록들을 모아 책을 펴냈다.       

 

증언집을 만들기까지 - 서문(번역)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

                                                                              번역 : 키무라히테토, 조영석

 

유골의 발굴을 시도하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간토(関東)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도쿄(東京)만 해도 사망자가 6 만명 이상이 나왔다. 15시가 넘어서자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의 방화가 많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며, 밤중이 되자 스미다구(墨田区)의 요츠기(四ツ木) 다리 등에서 조선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간토(関東)대지진 때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사건의 대부분은 정부에 의해 은폐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진상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1982년 7월, "간토대지진 때에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여 위령하는 모임 /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9월에는 아라카와(荒川) 하천 부지에서 유골을 시굴(試掘)하였다. 그 때, 나는 대학 4학년생이었다. 이 모임의 사무국 일원으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천 부지를 뛰어 다녔다.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시굴은 3일 동안 하천부지 세 곳을 발굴하는 것이었는데 "당일에는 다시 묻어야 한다"는 엄격한 조건으로 인하여 결국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이 모임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결성을 호소한 것은 고(故) 키누타(絹田幸恵)였다. 그는 아다치구(足立区) 이코(伊興)소학교의 교사였는데, 수업시간에 아라카와(荒川) 방수로에 대한 역사를 가르쳤다. 그때, 한 학생이 "선생님, 그렇게 큰 강을 사람들의 손으로 팠다니 믿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신의 교수법이 불충분하다고 느낀 그녀는 스스로 아라카와 방수로 굴착공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공사에 관련된 다양한 문헌을 조사함과 동시에 당시를 기억하는 주변 유역의 노인들에게도 증언을 듣고, 기록하였다.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항상 햇볕에 까맣게 타면서 매일 나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느 날 제가 "매일 뭐하고 다녀요?" 라고 물어보자, "아라카와 방수로 이야기를 듣고 다닌다"라고 대답했다"는 말을 그녀의 딸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키누타(絹田)선생은 동경도 북구의 이와부치(岩淵)에서 동경만(東京湾)까지 이어지는 아라카와 방수로의 중간지역에 가까운 스미다구(墨田区) 야히로(八広) 주변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목격 증언을 들었다. 수 많은 조선인들이 살해되었는데, 그 유골들이 지금도 하천 부지에 매장 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증언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1982년에 "간토대지진 때에 학살 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위령하는 모임(나중에 '추도하는 모임 / 추도회'으로 개칭)"을 결성한 후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기록을 수집하였으며, 한국에서도 조사하면서 매년 9월에 하천에서 추도식을 거행해 왔다.

1992년에 간행 된 『바람이여, 봉선화 노래를 날려라』(교육사료 출판회)에서는 그때까지 수집했던 많은 증언(총 150명)과 문헌 사료(史料)들을 정리했다. 그 중에서 "스미다구 북부에서는 간토대지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명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당시의 신문을 통하여 하천 부지에 묻혀 있었던 조선인 시신들이 경찰에 의해 비밀리에 발굴되어 이송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서였다(1923년 11월 12일, 14일). 그때부터 우리는 모임의 목표 중 하나였던 '유골의 발굴'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현장에 추모비를 세운다"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경찰에 의한 유골 발굴은 일본 정부의 방침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 총독부 경무국 문서인 "대지진 당시에 있어서 부정(不逞:불량)한 조선인의 행동 및 피살 조선인의 숫자에 대한 처리(処置)"에 그 방침이 기록되어 있다. "기소 당한 사건으로 조선인에게 피해가 있는 것은 즉시 그 유골을 불명(不明)할 정도로 처치(始末)할 것." 이러한 일본 정부의 방침에 의해서 아라카와 하천 부지의 조선인들의 유골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처리"되어 버린 것이다. (금병동,『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문제 관련 사료 -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식민지의 반응』, 녹음서방, 1996년에 수록)

 

아라카와(荒川) 하천(부지)에 추도비를

학살 사건 현장인 제방이나 하천(부지)은 국유지이므로, 추모비 건립에 관한 협상을 당시의 건설성(建設省)과 여러차례 하였지만 국유지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허가가 내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지역 스미다구(墨田区)가 협력을 해 준다면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구의회에 추모비 건립에 대하여 협력 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그러나 국유지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허가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 때가 2000년이었는데, 일단은 구의회가 '계속 심의'를 하였지만, 이듬해인 2001년에 불채택되었다.

이렇게 해서 공적(公的)인 장소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길이 막혀 버렸다. 그래서 그 다음은 사유지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으로 목표를 정하였다. 그러나 현장에 가까운 곳에 적당한 사유지가 매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우리는 매년 하천(부지)에서 추도식을 가졌다. 글고 그 후에는 제방 밑에 있는 선술집(居酒屋)에서 종료 모임을 가졌었다. 그때, 추모비 건립에 대하여 선술집 주인과 상담했다. 그러자 주인은 "땅을 찾기가 어렵겠죠. 나도 이젠 나이가 많아서 가게 문을 닫으려고 해요. 그러므로 이 땅을 당신들에게 팔테니까 여기에 추모비를 건립하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2008년에 선술집을 구입한 후에 그 곳을 개조하여 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갑자기 추모비를 세워서 이웃들로부터 민원이 발생하면 곤란해지므로 미리 주민들로부터 양해를 얻어 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듬해인 2009년 9월에 "관동대지진 때 한국, 조선인 순난자(殉難者) 추도비"가 건립되었다.

기념비가 건립되자마자 방문했던 카츠시카구 요츠기(葛飾区四つ木)에 사는 주민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저의 외할아버지로부터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을 죽였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5, 6명은 죽였다.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이 뒤에서 철 막대기로 때렸다.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을 때렸다고 자랑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자랑처럼 얘기했다." 이런 증언들을 몇 번이나 듣는 동안에 이 추모비가 그 당시의 사건을 공개적으로 발언하게 하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는 2015년에 추모비 옆에서 이사했다. 그리고 빈집은 지금 '봉선화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자료관과 회의실로 기능을 하고 있다.

 

증언이 전하는 사건의 피부 감각

나는 추모비 건립을 전후해서 관동 대지진 때 동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알고 싶어졌다. 지금까지의 증언들이 전해 주는 사건은 피부감각회(皮膚感覚会)의 노력으로 스미다구(墨田区) 북부에서 일어난 일은 파악되었지만, 동경 전체는 어떠했을까? 제가 태어나고 자란 아다치구(足立区)에서는 어떠했을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아사쿠사(浅草)와 우에노(上野)에서는 어떠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자 상상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지진이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은 일본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기 때문에 상세한 사실은 거의 모른다.

이제 90년이 지났으므로 지금은 당시의 증언자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제가 어슬픈 사람이지만, 이미 출판 된 책이나 잡지로부터 조사를 한다면 증언들은 수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때부터 나는 4, 5년에 걸쳐서 도쿄도내의 공립도서관 (주로 23구내)을 구석구석 찾아 가서 자서전과 일기, 그리고 향토 자료 등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증언들을 모았다. 또한 이렇게 모아진 증언들을 지역별로 정리하여 수제(手作り) 증언집 3권을 만들어 관심을 주신 분들에게 배포해 왔다.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 동경 변두리 필드워크 자료』,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사건 동경 필드 워크 자료(변두리 이외의 편)』, 『간토대지진 때의 조선인 관련 '유언비어' 동경 증언집』이 그것이다. (2011~12년에 작성)

이렇게 여러 증언들을 모아 보니까 도쿄경의 모든 장소에서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가 있었으며,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학대와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증언들에는 직접 체험했던 본인 만이 밝힐 수 있는 '구체성'이 있었다. 이러한 증언들 만으로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실태가 피부감각으로 전해져 온다.

 

이번에 현대서간(現代書館)의 협력으로 3권의 증언집을 하나로 정리하여 큰 증보판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 책을 정리함에 있어서는 각 지역마다 지도를 첨부하여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들을 직접 방문하여 걸으면서 검증하였다. 그리고 상세한 기준과 직접적인 증언 중에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던 곳과 사건의 구체성이 명백한 것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때 동경에서 학살을 목격했던 것과 유언비어를 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6페이지의 범례를 참조 바란다.

 

가해(加害) 역사를 직시(直視)하기

당시 증언들의 대부분은 검열에 의하여 복자(伏字:인쇄물에서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비운 자리에 ‘○’, ‘×’ 따위로 표를 찍음)로 하는 등의 제약을 받았으므로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고 있지만, 문장 표현 자체가 변조(수정)되었다는 논문을 부록으로 실었다. 대지진 직후에 어린아이들이 쓴 작문을 조선인에 관한 부분만 삭제한 예도 있다. 구체적 예시(例示)로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관련 증거조작의 예-『어린아이의 지진기』를 둘러싸고"가 변조한 예를 고찰한 것이다. 이러한 복자나 변조는 진실이 숨겨져 왔다는 증거이다. 조선인 학살 사건의 대부분은 당시의 정부에 의해 은폐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아직도 진상은 모른다. 

 

살해 당한 장소

이름과 인원, 그리고 유골의 행방 등과 같은 중요한 사실은 거의 모른다. 2013년에 한국의 시민단체로부터 초대를 받아서 한국의 서울에 있는 국회의원회관에서 아라카와(荒川)에서의 학살사건을 이야기 한 후에 어느 유족으로부터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결혼한 후, 동경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할머니는 한국에서 임신 해 있었다. 그때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는데 할아버지가 실종된 것이다. 그러자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오라"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계속 할아버지의 귀가(귀국)를 기다렸지만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할아버지는 실종 상태였다. 그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무덤에 넣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자식은 계속해서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단서도 없다. 저도 그 분에게서 "어떻게든지 협력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와서 나름대로 열심히 찾아 보았지만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정말 죄송하다. 유족들은 90년이 지났어도 절대로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간토대지진은 지금도 계속해서 유골을 찾고 있는 유족들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끝을 내 버린다면 가해의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곳에서 밖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저는 "죽이지 않는다." 그리고 "죽이지 않게 하겠다"는 일본인으로 살고 싶다고 소원하며 '추도하는 모임(추도회)'에 참여 해 왔다. 이 증언집이 역사를 바라 보는 관점 중 하나를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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