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학살의 증언, 학습 및 번역모임, 스미다구 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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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학살의 증언, 학습 및 번역모임, 스미다구 편 시작
  • 미디어기평 기자
  • 승인 2022.10.25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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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지역에서 일어난 간토학살의 1100가지 증언(니시자키마사오 엮음)을 공부하고 번역하는 모임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30분부터 2시간동안 진행되고 있다.

오늘부터는스미다구에서 수집한 간토학살사건의 증언과 기록을 공부하는데 내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자주 한숨을 쉬게 된다. 번역문을 다듬는 한일시민번역가들은 통역*번역을 하시는 분들이라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고어와 원문을 그대로 실었기에 문법이 맞지 않으면 문장의 미세한 표현 및 뉘앙스를 두고 감론을박하기도 하고, 다듬고 정리하느라 두시간 동안 3~4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렵다.

작년 7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몇차례 쉬기는 했지만 500페이지 가량의 책을 꾸준하게 번역하여 절반가량에 도달하고 있다.

첫 시작을 알리는 홍보물
첫 시작을 알리는 홍보물

오늘부터는 재일코리안 채OO씨가 번역을 시작하였다. 엑셀로 작업하여 왼쪽에는 일본어 원문을 싣고, 오른편에는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 눈으로 보기에 쉽게 편집하였다. 참가자들은 일본어로 한 번 읽고, 한국어 번역을 읽으며, 워너문에 가까운 번역을 우선하지만 아무래도 직역에 문제가 있을 때 가장 좋은 의역을 할 때면 말들이 많아지고 토론도 길어진다. 

오늘 스미다구의 증언내용은 학살현장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그 섬뜩한 공포감과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이 몸으로 전해져 들어와 몸도 마음도 무거워졌다. 몇가지의 증언을 소개해 본다. 

内田〔仮名〕
1日の夕方、5時か6時ころその原っぱ〔現・東あずま公園〕に通っている東武線の踏切のところに憲兵隊が3人くらいやってきた。憲兵隊は蓮田のなかにピストルをドカンドカンと撃ちこんで「朝鮮人が井戸のなかに薬物を投げた。かようなる朝鮮人は見たらば殺せ」と避難民に命令しました。
【略】一般の我々が爆動したのではなく、煽動したのは憲兵隊です。目で見て知ってます。
それでみんながいきりたって朝鮮の方がたを田んぼのあぜ道で。
もう本当に見ていられませんでした。朝鮮の方がたは田んぼの中の水のなかにもぐって竹の筒を口にくわえて上へ空気を吸い込みながら隠れていました。それも見つけだして、もうなんと言うか。あぜ道に死体がずらっと並べられているのを見ました。
殺された朝鮮人は普段からよく顔を合わせていたので知っていました。
また朝鮮人は服がちがうからすぐわかりました。
【略】自警団はすぐに、1日か2日のうちにできました。自警団を組織しろと命令したのも憲兵です。憲兵は、軍がのちにどうのこうのと言われないように、ことがすんだら、2、3日のうちぱあっと消えてなくなりました。在郷軍人が憲兵に相当協力していました。在郷軍人は在郷軍人会に入っていたので、自警団には入りませんでした。
(関東大震災時に虐殺された朝鮮人の遺骨を発掘し追悼する会『風よ鳳仙花の歌をはこべーー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から70年』教育史料出版会、1992年)

  우치다【가명】
1일 저녁, 5시나 6시 무렵 그 공터【현·히가시 아즈마 공원】를 지나는 도부선의 건널목 인근에 헌병대가 3명 정도 나타났다. 헌병대는 연꽃밭 속에 권총을 탕 탕 쏘아대며 “조센진이 우물 속에 독약을 던져 넣었다. 그런 조센진은 보면 죽여라”고 피난민에게 명령했습니다.
(생략) 일반인인 우리가 폭동한 것이 아니라, 선동한 것은 헌병대입니다. 직접 봐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격분해서 조선 분들을 논길에서. 더 이상 정말로 볼 수 없었습니다. 조선 분들은 연꽃밭 물 속에서 대나무 통을 입에 대고 위로 공기를 흡입하면서 숨어있었습니다.
그것도 찾아내고, 이제 뭐라 할까…. 논길에 시체가 쭉 늘어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살해 당한 조선인은 평소부터 서로 잘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습니다.
또 조선인은 옷이 다르기 때문에 바로 알았습니다.
【생략】 자경단은 하루나 이틀 안에 바로 만들어졌습니다. 자경단을 조직하라고 명령한 것도 헌병입니다. 헌병은 군이 나중에 비난을 받지 않도록, 일이 끝나면, 2, 3일 중에 사라져 없어졌습니다. 재향군인이 헌병에 상당히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재향군인은 재향군인회에 들어가 있었으니, 자경단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관동대지진시에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 『바람이여 봉선화의 노래를 전해다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로부터 70년』교육 사료 출판회, 1992년)

K.N
吃りの日本人が、間違って殺されました。
当時は「15銭」と言わせていましたが、つまって言えなかったんです。子供と女の人が泣いているので聞くと、そう言っていました。体に鉄砲の穴が空いていました。自警団がやったものです。
日本刀でメッタ切りに殺された人もいる。2、3人位だったら、いろんな所で殺されていましたよ。現向島署の前は昔は原っぱで、そこでも殺されていました。
(関東大震災時に虐殺された朝鮮人の遺骨を発掘し追悼する会『会報』第25号、1985年)
K.N
말을 더듬은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오인 받아 살해당했습니다.
당시는 「15전」이란 말을 시키고 있었는데, 더듬거려서 말하지 못했어요. 아이와 여성이 울고 있으니까 물어봤더니, 그렇게 말했습니다. 몸에 총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자경단이 저지른 짓입니다.
일본도로 마구 베어서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2, 3명 정도 살해 당한 곳은, 여러 군데였어요. 현 무코지마 경찰서 앞은 옛날에는 빈터였고, 거기에서도 살해당하고 있었습니다.
(관동대지진시에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 『회보』 제25호, 1985년)
高井としを〔労働運動家。当時亀戸の裏町の炭屋の2階に夫・細井和喜蔵と住む。震災後、夜は東京モスリン工場裏手のハス池辺に避難〕
3、4日目ころから、朝鮮の人をつかまえて小松川の方へ連れて行くのを見ました。朝鮮人が井戸に毒を入れたなぞといっているのをききました。在郷軍人だか右翼だか警官だか、その時はわかりませんでした。多い時には朝鮮の人を20人、30人ぐらいずつ麻のひもでじゅずつなぎにして、木刀や竹刀でなぐりながら、小松川の方へ連れて行くのを見ました。池のなかへ逃げこんだ朝鮮の人が、大きなハスの葉の下へもぐっているのを見て、ほんとうにお気の毒で言葉もでませんでした。見かねてにぎりめしと水を少しあげたら、手をあわせておがんでおられましたが、恐ろしいことでした。
(高井としを『わたしの「女工哀史」』岩波文庫、2015年)
타카이 토시오 [노동 운동가. 당시 카메이도 뒷마을 숯가게 2층에 남편·호소이 와키조와 살았다. 지진 재해 후, 밤은 도쿄 모슬린 섬유 공장 공장 뒤편의 연못가로 피난]
3, 4일째 쯤부터, 조선 사람을 잡고 고마쓰카와쪽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센진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재향 군인인지 우익인지 경관인지 그 때는 몰랐습니다. 많은 때에는 조선 사람을 20명, 30명 정도씩 마끈으로 줄줄이 묶어서, 목검이나 대나무 검으로 때리면서, 고마쓰가와쪽으로 끌고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못 속으로 도망간 조선 사람이 큰 연꽃잎 아래로 잠복하는 것을 보고 정말로 불쌍해서 말도 못했습니다. 내버려둘 수 없어서 주먹밥하고 물을 조금 드리면, 손을 비비면서 고마워하고 계셨습니다만,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타카이 토시오 『나의 「여공애사(女工哀史)」』 이와나미 문고, 2015년)

千早野光枝〔当時東京モスリン女工。1日の夜は工場の運動場で夜を過ごす〕

〔1日〕火焰が四方の空に物凄い光りを映して燃えていました。その中、誰言うとなく津波が襲って来るの、××人が押し寄せて来たの、〇〇人が爆弾を持って皆殺しに来るのと恐ろしい事ばかり、一晩中安らかな心もなく脅やかされ通しで、あっちへ逃げこっちへ逃げして明してしまいました。
翌る日はそれでも小さな握り飯を一つずつ貰って餓をしのぎました。〔略。2日〕その夜も津波騒ぎ、〇〇人騒ぎで脅やかされ通しです。
(震災共同基金会編『十一時五十八分ーー懸賞震災実話集』東京朝日新聞社、1930年)

치하야노 미츠에[당시 도쿄 모슬린 섬유 공장 여공.1일 밤은 공장의 운동장에서 밤을 보낸다]
〔1일〕화염이 사방의 하늘에 엄청난 빛을 비추며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누구 말할 것 없이 쓰나미가 덮쳐 온다든지, ××인이 밀려 왔다 든지, 〇〇인이 폭탄을 가지고 모두 죽이러 온다 든지 무서운 일뿐, 하룻밤 중 맘 편할 새도 없고 끊임없이 위협을 받아서, 이쪽 저쪽으로 도망치면서 밤을 새워버렸습니다.
다음날은 그래도 작은 주먹밥을 하나씩 받아서 굶주림을 견뎌냈습니다. [생략. 2 일] 그 밤도 쯔나미 소란, 〇〇인 소란으로 계속 위협 받았습니다.
(지진 재해 공동 기금회 편 「11시 58분--현상 지진 재해 실화집」도쿄 아사히 신문사, 1930년)

어떤 사람들은 간토학살사건이 100년이 되어가는데, 그냥 덮어두어도 좋지 않은가하며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만일 일찍 태어나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갔다가 말로 할 수없는 이런 국가에 의한 폭력을 당했다면 어찌 침묵을 강요받을 수 있겠는가?

죽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국가폭력에 대해 그 누구도 이제 그만 기억을 복원하고 재생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해서는 안되다. 만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아픔에 침묵한다면 결국 살아있는 자들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간토학살피해자 100주기 추도사업 중 아주 중요한 증언집의 번역에 참여할 수 있는 일본어*한국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조만간 20대의 재일동포 청년의 참여하기로 되어 있어 참으로 기대된다. 20대부터 80대까지 각자 세대에 사용한 언어와 그 뉘앙스를 다투는 과정도 그 자체가 학습이 된다. 일본말을 혹은 한국말을 거의 못하는 사라들에게도 간토학살사건의 이해를 위해서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된다. 

'2023년 9월까지 한국어로 출판 수 있을까?' 모두 염려하면서도 번역은 무지하게 꼼꼼하게 살피고 있으니, 아마도 9월에는 1부로 나누어 출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번역에 참여하실 분은 https://us02web.zoom.us/j/7485076506 으로 참여하실 수 있다. 하지만 사전에 010-5382-2406(진행자)에게 문자로라도 연락을 주어 사전에 회원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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