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후지노모리에서 만난 야끼가야타에코
2006년 아힘나한일청소년캠프에서 야끼가야타에코 할머니를 만난 일은 우연이었을까?
1923년 치바 나기노하라에서 조선인 청년이 마을 자경단에 의해 살해되던 순간을 목격한 소녀. 당시 10세 소녀였다.

"9월 1일, 도쿄를 엄습한 간토대진재는 큰 화재를 동반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대참사였습니다만, 이 대진재 중에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되는 이중의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9월의 진재에서 며칠 지난 어느 날 아침, 반종이 울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30호 정도의 부락이 모이는 광장에(모여있었고), 한 명의 반팔 라운드 티를 입은 사람이 고개를 숙여 잡혀있었습니다.
마을사람은 모두 모여서, 아이들은 그 둘레를 빙빙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잡힌 사람이) 조선인이라는 것은 모두가 이야기하는 속에서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재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더러워진 유카타를 입고 있어, ‘이 놈들(조선인)이 우리를 이 꼴로 만든거야!’ 라고 욕하고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 안 지나서 그 조선인을 끌고 공동묘지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를 등지고 묶였습니다. 눈이 가려졌습니다. 총살되는 때에는 ‘아이고, 아이고’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도 생각납니다.
누가 총을 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기까지 보았을 때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 지금 명백히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계셨는데 ‘할머니, 불쌍해서 눈뜨고 볼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엉엉 울었던 것도 기억합니다. … 이것이 제가 목격한 사실입니다.


사건발생 이후 국회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간토 학살 피해자 추도식
2007년 9월 3일, 84년 만에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전시회와 토론회, 그리고 추도식이 열렸다. 이 날 참석한 재일사학자 강덕상박사와 일본 사학자 야마다쇼지박사는 한국 국회에서 계엄령에 의한 일본의 간토학살에 대한 국가책임을 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 아시아하우스에서 2007년 11월 13일, 도쿄에서 [간토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시민연대]가 결성되었다.



2008년 3월, 한일재일시민연대는 한신대 학술원 인문학연구소와 공동주최한 심포지움에서 3.1운동과 간토학살사건의 연계성을 밝히는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2008년 85주기 추도식은 한일재일연구자들이 함께 참가하는 추도행사와 학술토론회가 일본에서 열렸다. 한국에는 한신대 국사학과 서굉일교수가 참석하여 발표하였다. (2008년 9월)


3월과 9월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두 차례의 심포지움에서 일본의 조선인학살사건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민중들, 그리고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한 연장선에서 간토학살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2009년 3월 27일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방문해 간토학살사건이 과거사해결의 주요문제가 아님을 확인한 한일재일시민연대 활동가들



한일재일시민연대는 간토학살사건을 조사하고 일본의 국가책임을 물어,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기를 요청하였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법이 정한 연구조사의 범위 밖에 있는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2009년 3월 28일 일본 연구자 활동가 초청 / 연구, 조사활동
제4차 심포지움에서는 일본의 연구자와 법조인의 연구와 조사를 통해 일본의 국가책임을 맑히고, 이를 세계적 문제로 부각시켜야 함을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고이즈미총리에게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권고문을 보낸(2003) 과정을 밝힌 아즈사와카즈유키변호사, 간토학살사건을 세계사적 제노사이드로 알려 UN에서의 반인도적 국가범죄로 접근해야 함을 역설한 마에다아키라박사, 그리고 일본의 국가적 책임도 있지만 민중의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는 야마다쇼지박사를 초청하였다.




간토학살피해자의 헛묘를 만들어 추모하고 기억하려 했던 유족들 (전남 신안 팔괘리)
2009년 3월 29일




"돌아가신 양반들의 영혼을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잖아.
창으로 찔러 죽이고, 톱으로 썰어서 죽이고 이런 짓거리를,
그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들을 그렇게 죽였어.
그래서 일본말로 가라묘시벤인지 그렁께 헛묘여,
고향에 헛묘를 만들어 주고, 거기에 옷을 묻어주었지요"
"호적, 대적보에 1923년 9월 아사쿠사에서 죽었다고 쓰여 있어요"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조들의 한을 누군가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죽어도 여한이 없소"
유족 김대원씨가 언급한 큰아버지와 그 형제들의 이름이 2013년 11월에 공개된 간토피학살자명단에 들어 있었으나, 김대원씨는 그 명단이 발표되기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9년 8월 5차 심포지움 - 불의한 국가권력은 집권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고, 국민도 민족도 학살할 수 집권을 위해 거짓뉴스를 퍼뜨려 제노사이드를 감행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특별히 5.18의 계엄발포과정과 1923 일본 내각의 계엄발포과정이 모두 정부에 의한 거짓뉴스의 확산유포 후 즉시 계엄령을 발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음을 부각하였다. 즉 '유언비어를 믿는 민중들의 조선인 살해'라는 인식 속에 역사왜곡의도가 숨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대안학교청소년들과 대학생들과 간토학살현장 다크투어리즘 실시
2009년 8월 9일 ~ 15일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의 발족 (2010. 9. 24)
한일재일시민연대의 일본 협력단체네트워크가 조직되었다. [간토대진재조선인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이 발족하였다. 이후에 일본 중의원, 참의원 중 올바른 역사청산을 위한 입장을 견지하는 의원들로 하여금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질의를 통해 학살의 국가책임을 지속적으로 묻고 있다.


2011년 9월 제주 4.3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전시회, 심포지움, 유족찾기



제주4.3평화공원에 세계 제노사이드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에는 간토제노사이드가 없다. 제주4.3사건을 세계 제노사이드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전시기획의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간토학살사건 역시 세계 제노사이드 역사 속에 누락되어 있다.

특별기획 전시회는 8월 27일부터 9월 11일까지 진행되었다. 그 기간동안 제주도 대정면 인성리가 고향인 학살피해자 조묘송일가(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살해한 사건)의 유족을 찾는 일이 진행되었다. 1년 뒤 유족을 찾았고, 피학살자명부를 통해 확인되었다.
한일URM회의에서 일본과 한국의 간토학살진상규명 촉구 성명 (2013. 3.18)

성명서 내용 중 - "제9회 한일 NCC-URM 협의회의 성명에 의거해, 간토 조선인학살 희생자 90주년 추도식 한일 공동준비위원회에서 준비한 ‘간토 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지지하고, 한일정부의 조속한 진상규명을 요구한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민간조사단 활동 -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사회위원회, 에큐메니안기자로 구성
2013년 7월 2일~6일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는 사건발생 90주기를 맞아 동북아역사재단의 후원으로 민간조사단을 조직하여 4박5일간의 일정으로 조사활동을 벌였다. 제1세대 연구자들(강덕상, 야마다쇼지)이 안내를 맡았고, 상세한 안내는 다나카마사타카교수가 주관하였다. 김령순 아힘나평화학교의 교사가 통역을 맡아 수고하였으며, 보고서를 제작하여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별위원회로 보냈다. 이 일로 동북아역사왜곡특위에서 정부가 간토학살진상규명의 노력을 하였는지 질의하였고, 이 해 말에 간토학살피해자명부가 정부에 의해 공개되었고 특별법제정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보화종루를 세운 故 심우성 선생
“종루에 들어갈 기와와 돌·나무에 기술자·일꾼까지 배에 싣고 일본까지 건너갔어요. 김의경씨 등 10여명의 동지들도 함께 타고 갔지. 일본에서도 가와지리와 동포 영화감독 오충공씨 등이 기꺼이 동참했어.” 비용은 113명의 국내 인사들이 댔다. 종루 완공에 맞춰 열린 추모공연 때 ‘살풀이’ 독무를 춘 이가 심 소장 제자 이애주 교수였고, 중요무형문화재 104호 ‘새남굿’의 특별공연도 열렸다.
지금 보화종루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에 받은 충격으로 비틀려져 있으며, 채색이 벗겨져 보수가 필요하다.
2013년 8월 동북아역사주최로 열린 심포지움에서 한일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90주기를 맞아 공동행동의 과제를 모색하였다.


2013년 11월 4일 WCC 부산대회에서
세계교회협의회 WCC부산대회에서 세계 기독인들에게 간토학살의 진실을 알리며, 유엔에 일본의 '반인도적 제노사이드'를 부각시켜가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3년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2013.11.25)

유기홍의원의 대표발의로 여야의원 103명의 공동명의로 [관동대지진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되었다. 그러나 본 회의에 오르지 못하고 결국 폐안이 도고 말았다.
2014년 8월 29일~9월 2일까지 한일재일대학생 공동연구 참여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는 간토학살사건을 대중적으로 알리기 위해 한국의 한신대학 학보사기자단과 도꾜조선대학 그리고 일본의 센슈대학원 연구자, 그리고 각 대학의 책임교수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조사활동을 실시하였다. 한신대학교 학보사기자들은 조사활동에 관한 보고서를 학보에 게재하였고,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는 동영상을 유투브에 올렸다.




2015년 7월 20일 간토학살 특별기획 전시회를 전국 순회 개최
2015년에는 서울의 국회의원회관, 성남시, 오산시, 안성시, 군산시 등 순회 전시회를 하였다. 성남시(이재명 시장)는 청사 로비를 전시장으로 내어주어 전시를 할 수 있었다.



2016년 서일본에서 간토학살 패널전시회 개최
2008년 서일본(기타큐슈, 타가와, 시모노세키)에서 순회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는 한일재일시민연대 일본회원들은 2016년에 시모노세키 가톨릭 교회 강당에서 전시회를 열고 한국에서의 진상규명활동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였다.
시모노세키의 NPO시민단체 닛코리(대표 쿠와노야수오)는 동일본에서 일어난 간토대학살사건의 피해조선인을 지속적으로 추도하고 시민들에게 올바른 역사사실을 공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17년 간토학살피해자 위령비, 추도비 탁본제작 프로젝트
일본 간토학살지역에 세워진 추도비 및 추도시설은 있는 지역은 현재까지 30여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추도비 탁본 프로젝트는 한신대 탁본동아리 회원과 탁본연구자들로 구성하여, 치바 마고메 위령원 추도비와 칸논지(觀音寺)의 추도비, 그리고 사이타마의 강대흥묘비, 도쿄 아라가와의 추도비 총 4기를 채탁하였다.




2018년 간토 다크투어리즘
-- 일본 간토지역에서 학살피해자를 추도하는 행사를 찾아가는 간토 다크투어에 기독교NPO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2019년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건립을 위한 캠페인] 시작
2023년이면 간토학살사건이 일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간토제노사이드 상설전시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건립위원 6,661명을 모으는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이를 알리기 위해 한일뮤지션들이 참여하여 천안 낭만극장, 서울 한신대학원, 성남 주민교회에서 토크콘서트를 개회하였다.


2020년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건립을 위한 리모델링 공사] 착수
시민들의 참여가 진행되는 동안 아우내재단과 주민신용협동조합 사회적협동조합 기억과평화는 토지와 건축비와 전시관 기획 등의 짐을 나누기로 하고 5월부터 8월까지 아우내 재단 내 각 건물과 주변공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실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