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아다치구(足立区)에서 일어난 조선인학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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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아다치구(足立区)에서 일어난 조선인학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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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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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7. 12. PM.4~6 첫 모임 시작

아다치구(足立)

 

A (당시 동경 거주,   한국으로 귀국서울 거주)

A씨는 동경도 내(内) 변두리에서 피혁을 가공하는 작은 마을 공장에서 근무했다. 대지진 재해로부터 2일 후에 담당자로부터 "센주(千住)로 가재도구를 옮기라"는 명을 받고 가는 도중에 자경단(自警団)으로부터 검문을 받았다. 그 때, "너 조선인이지? 키미가요(君が代:일본 국가)를 불러 봐! 10엔 50전(쥬엔 고짓센:한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말해 보라!"라는 협박을 받았으며, 그곳에 있었던 경찰들도 곤봉으로 등을 때렸다. 이어서 양손을 뒤로 해서 철사로 묶은 후에 아라카와(荒川) 방수로까지 연행당했다. 

(생략) "이 새끼, 악마! 조선인!"이라고 소리치면서 앞치마를 입고 있던 주부가 죽창으로 A씨의 오른 발을 찔렀다고 한다. 그렇게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빠루와 같은 갈고리 같은 것(鳶ロ)을 가진 남자가 등을 갈겨 쳤으며, 잠옷 같은 옷을 입은 다른 남자가 일본도로 어깻 죽지를 내리쳤다.

그 때 어디에선가 시체를 쌓아 싣고 오던 수레의 바퀴가 빠지면서 넘어지자 목 없는 시체와 임신 한 여자의 알몸 시체가 흩어졌다. 자경단 중의 몇 사람이 지금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수레를 일으키기 위해 A씨의 곁을 떠났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일본도(日本刀)를 내리 쳤을 때, 묶여있던 철사가 빠졌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기어서 근처의 갈대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심야가 되어 물에 퉁퉁 불은 발을 질질 끌면서 간신히 공장으로 돌아 갔다. 그 후 헌병대에 의해 나라시노(習志野)로 연행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생략) 갑자기 단상에 있던 A씨는 사람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겉옷을 벗어 상반신을 드러내고 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등을 보였다. 엄청난 채찍의 상처와 큰 화상을 입은 피부, 그리고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칼 상처를 보여 주었다. 그 곳의 회장(会場) 촬영이 허용되었던 나리타(成田)씨는 "이런 상처를 60년간 짊어지고 왔었구나"는 생각이 나서 도무지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관동대지진 기념집회』 세종문화회관, 1982년 I 『동갈류산연구』 J 제22호、륜서방출판、2003년)

 

B (당시 야나이하라(柳原) 거주야채가게.)

이곳은 지금의 공단주택이 있는 곳에 쪽방 같은 합숙소가 있었는데, 감독이 그곳에 약 15~6명의 조선인들을 살게 했죠. 방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감독은 조선인들이 유언비어로 인하여 위험하게 된 사실을 알고, 제방 바로 옆에 있던 청량사(清亮寺)에 조선인들을 모이게 했다. 당시 그 절의 창괘송(槍掛松:늙은 소나무) 밑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다. 감독은 그 곳에 젊은 조선인들을 모이게 하여 밧줄로 묶고 "너희들, 여기서 도망치지 마라. 도망 가면 위험해!" 라고 말했다. 그때 몰려 온 일본인들이 욕설을 퍼 붓자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젊이들이다. 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로 손 대지 마라"면서 그들을 지켰어요. (관동대지진 때에 학살 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여 추모하는 모임 회보』 제27호, 1985년)

 

아오키(, 가명)

우리 집은 아라카와(荒川)의 마찌야(町屋)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들과 집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인가(4일), 다음날 밤인가, 아라카와 제방 북쪽으로 걸어 갔다. 집은 센쥬(千住)의 구(旧) 닛코가이도(日光街道)에서 남쪽으로 나오면 센주 불다리(火橋)를 건너자마자에 있었으므로, 대지진으로 인하여 불이 꺼져 버린 깜깜한 아라카와 제방을 아라카와역(현, 야히로역) 주변을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때 연이어서 세 사람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했기 때문에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걸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자경단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너희들 조선인이지?" 라면서 여러 가지를 질문을 해 왔다.

나는 "일본인이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노발대발하면서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걷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의 일본어 발음을 들어보면 분명히 조선인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내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소는 센쥬의 나구라(名倉)의원 남쪽 부근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이 다가와서 "너는 일본인이다" 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하고 말았다. 총으로 당한 것 같다.(키누타 유끼에 "지금도 유골은 하천 부지에" 『통일 평론』 1981년 10월호, 통일평론사)

 

이와오 켄(岩尾 )

(1일, 타케노즈카(竹ノ塚)에) 무코우지마(向島)에서 도보로 돌아 왔어요. 귀가했을 때는 정말이지 조선인들의 소동으로 1일부터 5일동안 매일 밤 엽총을 쏘고, 석유 깡통을 땅땅 두드리면서 모두를 잠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두드리는 소리를 내면서 마을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전혀 잠을 자지 못했어요. 잠을 자면 살해를 당하거나, 여러가지로 나쁜 짓을 당하기 때문이었어요. 

(일조협회토시마지부편(日朝協会豊島支部編) 『민족의 극 -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기록』 일조협회토시마지부, 1973년)

 

코후네 키요시(小船淸) (당시, 후카가와구(深川) 후카가와 辱常학교 4학년)

(2일) 센쥬(千住)에서는 "000이 불을 지르면서 돌아 다닌다"고 했기 때문에 밤에도 자지않고, 재향군인과 청년단이 순서를 정하여 칼을 들고 걸어 다녔다. 그러면서 몇 번씩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면 "잘라 죽이겠다"고 했기 때문에 큰 소동이었다. ([대지진] 동경시역소 시청 동경 시립소학교 아동 지진재해 기념문집, 辱常4년의 권』 배풍관, 1924년)

 

코미야 쇼류(小宮昌隆) (당시 부립 3중학교 학생키타센쥬(北千住)에서 피재)

(2일밤) 그날 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자경단을 조직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웃의 조직 중에 폭력단 집이 있었는데 "자경단이라면 (우리에게) 맡겨 주세요" 라고 전해 왔기 때문에 맡겼습니다. (『관동대지진재기-동경부립제3중학교 제24회 졸업생의 추억』 부립3중 「무지개회」, 1993년)

 

사다무라(定村萍) (동요 시인, 소학교 교원)

 (2일 밤) 아라카와(荒川) 제방 위쪽으로부터 남쪽 방향의 제도(帝都)를 뒤돌아 보았는데, 불 기운은 계속 타 들어 가고 있다. 야마노테(山の手)는 지금 한창 연소되고 있을 것이다. 때때로 쾅쾅 하는 큰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것은 주택이 무너지는 소리일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지옥 탈출을 연상하면서 니시아라이(西新井) 다리를 건넜다. 그 다리에는 자경단들이 모여 행인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이때 친절하고 세심한 재향군인은 "너무 멀리 가는 것은 위험하므로 오늘 밤은 대사당(大師堂)에 가서 머물라"고 일일이 세심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대사당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였는데, 아사쿠사(浅草)에서 탈출해서 장장 3시간이나 걸렸다.

 니시아라이(西新井) 부근 촌락의 소란은 또 한 단계가 더 있었다. "코스게(小菅) 감옥의 죄수들이 탈출했다는 보고가 있다. 오늘 밤은 대경계가 필요하다." "이 부근의 제방 공사에 종사하고 있던 조선인 중에 불량한 사람들이 있어서 시골 집에 불을 지르기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다. 우물에 독극물을 투하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온 촌락 사람들이 총출동 하여 경계를 하고 있다. 재향군인단, 청년회원들에게는 "필사적으로 수비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사원의 종소리는 뎅- 뎅- 하고 울린다. 비상 나팔도 불고 있다. 자전거는 팔방으로 날아 다닌다. 통행인들은 모두 일일이 불러서 조사를 받고 있다. 그 삼엄함과 살벌함은 계엄령과 같다. 

 한 청년에게 "이 근처의 조선인들이 과감한 폭거를 가하거나 큰 소란을 피우고 있지는 않는가?" 라고 질문하자, 곧바로 "평소에는 별로 큰 폭거도 못하는데 이번 지진을 기회로 삼아서 갑자기 두목(頭首)으로 보이는 놈이 들어 가서 지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밤이 되면 농가에 불을 지르고, 도적질을 해 대서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정도였기에 주민들이 떠드는 것은 정말 무리가 아니다. 절제가 없는 그들은 이런 천재지변으로 무(無) 경찰 상태가 되므로, 이것을 기점으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들을 체포하여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니시아라이 대사당에는 100여명의 피난민들이 보호를 받고 있다. 대부분 동경에서 탈출한 것 같다. 각자는 서로가 겪었던 조난 이야기에 빠져 있다. 이 밤의 대다수의 피난민들은 여성들이다. 그들이 오늘 밤의 외부의 소란을 걱정하면서 서로 잡담을 하고 있을 때, 전령이 와서 "지금 죄수로 보이는 2, 3명이 들어 왔으므로 여러분은 대사당 안으로 들어 가고, 남자들은 밖에서 지키라"고 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그러자 부인들은 얼굴이 흙색으로 변해서 근거도 없는 말을 하면서 서둘러 대사당 안으로 들어 갔다. 이어서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났다. 그러자 한 두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다른 다람들이 안심했는지 다시 원래의 현관에 모여서 한바탕 잡담을 나눈다. 이리하여 몇 번의 경보로 인하여 숨기도 하고, 밖으로 나오기도 하면서 하룻밤을 지샜다. 

(생략. 3 일) 어느 마을이었는지 그 지명은 잊었지만, 한 마을에 도착했다. 길거리는 마치 백성들이 봉기해서 싸우는 것처럼 소란했다. 그들은 모두 죽창, 철봉, 도검(刀剣), 장창(長槍) 등을 들고 있다. "무슨 일입니까?" 라고 묻자 "불량한 무리가 많이 들어 왔다." "이 앞 마을 외곽에서 여성이 폭행을 당했다. 대단히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마쯔도(松戸) 방면에서 불량한 사람들 300여명이 각각 폭탄을 휴대하고, 이 마을로 몰려 오고 있다."고 하자 대혼란에 빠졌다. 나는 "아무런 원한도 없는 이 마을을 습격하는 것이 정말일까" 라고 생각했지만, 이 때 무심코 "내가 조선인의 냄새라도 났다면 살해 당했을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땡땡땡…" 하는 시끄러운 종이 울렸고, 나팔소리도 들렸다. 걸어가기 조차도 힘든 여정이었다. 

(定村青萍 『꿈의 도시 – 대정(大正) 12년 9월 1일 - 대지진대재해조난실기』 타다야(多田屋) 서점, 1923 년)

 

세끼도() (당시 15세, 히가시타카하시(東高橋)에서 피재, 2일에는 센쥬(千住)에)

 (4일부터 5일 경) "조선인들이 우에노(上野) 쪽에서 몰려 오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마을에서는 "15세 이상은 모두 나오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이어서 "대나무를 깎아 불에 굽고, 유채 기름을 바르고, 모두 모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당시 15세였기에 가장 어렸습니다. 그래서 센쥬의 야나이하라(柳原)라는 곳에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지요. 살해 당한 겁니다. 제 기억으로는 3, 4구의 시체가 있었어요. 처참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철봉인지 뭔가로요. 

 그 조선인들의 소동이 진정이 된 것은 5일경입니다. 처음에는 "우에노의 마쯔자카야(松坂屋) 쪽에서 1500 명 정도가 이 쪽으로 쳐들어 온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대단한 살의를 가진 그들이 쳐들어 오면 우리가 당한다"면서 죽창을 지급했습니다. 그런 루머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에도 동경박물관 조사보고서 제10권, 관동대지진과 안세이(安政) 에도(江戸)지진』 에도 동경박물관, 2000년)

 

타나카(田中松藏(당시 센쥬(千往) 거주)

 "흐음, 아라카와(荒川)에서의 일을 말하면요. 타이세이(大正) 지진 때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소학교 6학년 때입니다. 아저씨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죽창을 가지고 철교와 다리같은 곳에서 야영을 하면서 경계를 했죠. 조선인들이 먹을 거리가 없어서 폭동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런 일도 있었어요". 

(오카자키 유키오(岡崎征男) 편저 『노인이 말하는 메이지(明治) 43년의 변두리의 대수해(大水害)』 시타마찌(下町) 타임스사, 1995년)

 

仁口閔之亟(니구찌) (당시 니시아라이 마을 동경방적주식회사 근무)

(근무처가 납작하게 됨) 그 다음에 들려 온 것이 '유언비어'이며, 1일 저녁 무렵부터는 누구나 "재류(在留) 외국인이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동경 안에 있는 우물에 독을 넣어 일본인을 모두 몰살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우리도 직원들과 함께 서투른 죽창을 만들어 저녁부터 아침까지 철야로 공장 및 그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나는 9월 3일 아침 무렵, "동경시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겨서 혼자 사택을 나와 니시아라이 다리 북쪽 부근까지 걸어 갔다. 그때, 경계 중이었던 몇 명의 일본인에게 불려 갔다. (생략. 질문에 대답하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아다치구(足立区) 환경부방재과편 『관동대지진 체험기』 아다치구, 1975年)

 

根本秋一(네모토) (시타야(下谷) 류센지() 마을에서 피재. 1  키타센쥬(北千住) 아라카와 제방에서 유언비어를 듣다.)

 유언비어가 난무한다. - "해일(쯔나미)이 온다고? 반란이 일어났다! 자기 방위를 위해 무장하라. 우물에 독을 넣었기 때문에 물은 마시지 마라." 등등– 

 

(생략. 3일) 불에 탄 자리를 가 본다. 그러자 아버지도 언니도 건강하게 숙사를 짓고 있었다. 누나는 머리띠를 하고 죽창을 들고 서 있었다. (시나가와구(品川区) 환경개발방재과 『대지진에 산다 - 관동대지진 체험기집』 시나가와구, 1978년

 

堀切一(호리키리 이치로) (당시 미사토() 거주)

(나카가와(中川) 개수(改修)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무자들은 두 곳(幸房組, 矢口組)에서 일하고 있었다.) 

"코우보우(幸房) 조(組)에 있었던 4명의 여자 조선인들은 야시오(八潮:사이타마현)에서 시오도메바시(潮止橋)를 건너 왼쪽으로 가는 하나바타케촌(花畑村:꽃밭 마을)과 동경 아다치구 신메이쵸(新明町) 아야세강(綾瀬川)에서 죽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야구찌조(矢口組)에 있었던 12~13명은 코시가야(越谷:사이타마현) 경찰서로 향했다. 

(「동경의 미즈모토(水元)와 하나바타케(花畑)에서 죽었다」 관동대지진 50주년 조선인 희생자 조사, 추도사업 실행위원회편 『감춰진 있던 역사 - 관동대지진과 사이타마의 조선인 학살사건』 관동대지진 50주년 조선인 희생자 조사, 추도사업 실행위원, 1974)

 

堀口登志(호리구찌) (아버지가 아라카와(荒川) 방수로 공사의  감독)

"대지진이 있었을 때, 아버지와 직원들은 모토기(本木) 외곽(지금의 테라다(寺田)병원 옆 공터를 내무부가 빌려 줌)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집도 적었으며, 키치죠인(吉祥院)에서 테라다(寺田)병원까지 큰 대나무 숲이 많이 있었습니다". 

(생략) 3일 경인가, 아버지에게 몇 명의 조선인들이 찾아와서 "쫓기고 있다"고 말했다. 모토기에는 상당히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곳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친구와 동료들을 모으려고 여기저기를 달렸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50명 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청년단과 소방단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와서 조선인들을 둘러 쌌습니다. 그러자 우메다(梅田)에서 수제(手製) 종이를 만들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야붕(親分)"으로 불리고 있었던 삼촌 후카이(深井)가 와 주었습니다. 아버지(菅原徳次)는 "이 사람들은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 지금 내무부의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내무부 관리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만약에 이들을 가해한다면 내 생명과 바꾸라"고 고함을 치자 아무도 참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생략) 결국 마지막에는 경찰에 넘지 않고 "그렇다면 좋다"는 양해를 얻어 끝났습니다. 그 결과 이 사람들 중에서는 한 명의 사고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후에도 이곳이 그리워서 명절 등에는 찾아 왔습니다. (관동대지진 때 학살 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여 추모하는 모임 『회보』 제62호, 1992년)

 

성명 미상

불행하게도 아라카와(荒川) 방수로 주변에서도 조선인 학살이 많았다. (생략) 야나이하라(柳原)에서 "방수로의 인부가 독체를 빌렸는데, 그 곳을 모두가 둘러 쌌다. 그런 와중에 촛불을 끄고 나온 사람에게 다가 가서 마구잡이로 수로에 쳐 박고 난도질 한 것을 보았다. 10명 정도가 살해 된 시체를 보았다"고 한다. 

(田嶋昌治(타지마), 『지역의 역사 발견 – 걷고 들으면서 조사』 崙書房出版、2005年, 2005 년)

 

센쥬(千住) 경찰서

9월 2일 오후 7시 경에 유언비어가 돌았습니다. "불량한 조선인 약 300여 명이 이미 미나미센쥬(南千住)을 덮쳤으며, 세력의 힘을 얻어서 다른 관내를 침범하고자 한다." 즉, 경찰서 직원들이 센쥬오오하시(千住大橋)와 센쥬역 구내 화약적재 화차(火薬積載貨車)를 경계했지만, 결국은 맥없이 당하자 민중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러자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 박해가 벌어지고, 관내에 살기가 넘쳐, 9월 3일에는 센쥬동네에서 조선인 1명과 그를 보호했던 내지인(内地人)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리고 니시아라이 마을 코시노(西新井村字興野)에서는 살인사건이 있었으며, 남쪽의 아야세 야나이하라(南綾瀬村字柳原)에서는 조선인 주택을 습격해서 7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센쥬마을에서도 한 명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강북마을 카누마(江北村鹿沼)에서는 조선인으로 오인(誤認)하여 1명의 할머니를 구타해서 죽였다. 그리하여 4일에 이르자 "조선인 부녀들이 독약 등을 휴대하여 각 처의 우물에 살포하였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민심은 더욱 더 동요되었다. 이어서 남쪽 아야세 마을야나이하라에서 1명의 조선인이 살해 당했다. 자경단의 폭행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타이쇼대지진 화재집』 경시청, 1925년)

 

호우치신문(報知新聞)』 (1923년 10월 10일)

(3일) 이순풍(李順風)은 남쪽 아야세 마을 야나이하라(府下南綾瀬村字柳原) 집에서 동거하는 이웃 6명과 함께 센쥬 마을 자경단(千住町自警団)이었던 友野済蔵(토모노 47), 山崎濱吉(야먀자키 20), 田口清三(타구찌 22), 中山金治(나까야마 36), 村松治(무라마쯔 21) 등에 의해 일본도(日本刀)로 학살되었다. 또한 같은 집에서 도주했던 이흥순(31)은 다음날 아침에 근처의 논에서 伊藤金次(이토우 26), 吉野市五郎(요시노 41)등으로부터 살해되었다.

 

호우치신문(報知新聞)』 (1923년 10월 20일)

이희현(李熙玄)씨는 9월 3일 밤 10시 경, 피난 중에 니시아라이(西新井) 동사무소 앞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재향군인 우치다(内田蠶 30)와 요시자와(吉沢亀太郎)(38), 테즈카(手塚分)에게 호총(狐銃)으로 사살당했다.

 

호우치신문(報知新聞)』 (1923년 10월 20일)

(4일) 오후 2시 경, 사이타마현(埼玉県)에서 관동(関東) 계엄사령부로 호송 중이었던 조선인 손봉원 외 4명을 하나바타케마을(花畑村 宇久右衛門新田) 자경단 카나스기(金杉熊五郎 40) 외 8명이 같은 지역 아야세강(綾瀬川) 타쿠미바시(匠橋)에서 살해하여 시체를 강으로 던졌다.

 

호우치신문(報知新聞)』 (1923년 10월 20일)

 센쥬나까구미(千住中組) 자경단원 하나이(花井惣之助, 28) 외 수 명이 같은 장소 유곽에서 조선인 1명을, 센쥬미슈쿠(千住三宿) 자경단 모리카와(森川一栄, 26)는 같은 지역 2쵸메(2丁目) 건너에서 30세 정도의 조선인 1명을 각각 살해하였다.

 

국민일보(民日報)』 (1923년 10월 20일)

9월 3일 오후 5시 경, 센쥬마을(府下千住町) 2-8-81번지에서 조선인 한용기(29)를 박살 낸 범인은 같은 동네 나까구미(中組) 노동자 타카하시(高橋義興 24)와 마쯔이(松井榮之助, 27)의 짓으로 판명되어 수감 됨.

 

요미우리신문(読売新聞)』 (1923년 11월 27일)

(조선인 살해는 징역 1 )

센쥬마을(府下千住町) 4-491번지의 모리카와(森川一栄, 26)가 9월 2일 밤 10시 경에 야간 경비를 하던 중, 같은 마을의 2-1888번지 앞에서 다수의 경비원들이 조선인 최규석(33)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는 즉시 불량 조선인으로 오신(誤信)하여 일본도로 등을 베어 버렸다. 이 살인 미수사건은 동경 지방재판소 형사 3부 하시모토(橋本) 재판장 타나마찌(棚町)검사의 담당으로 심리 중이었지만 26일 오후 1시 반에 피고를 징역 1년 6개월에 처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법률신문(法律新聞』(1924년 1월 30)

(조선인 살해 자경단의 판결)

작년 9월 3일 밤, 니시아라이코시노(府下西新井村與野) 거리에서 조선인 1명을 호총(狐銃)으로 사살 한 자경단원 우치다(内田傳之助, 30)와 제지업자 요시자와(吉澤亀太郎, 27)에 관련된 살인사건의 판결 선고는 지난 달 30일 오전 11시, 동경 지방법원 형사 3부 미야기(宮城) 재판장 대금(帯金) 검사계에서 개정(開廷)되어, 피고 두 명에게 징역 2년, 단 3년간 집행유예 판결 선고가 있었다.

 

동경 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1924 2 14 석간)

(조선인 살인 판결 두 명에게 징역 1년)

미나미센쥬나카구미(府下南千住中組, 니시자키 참고(西崎注) : 센쥬나카구미의 잘못) 

 605노동자 타카하시(高橋義興, 24), 마쯔다(松田榮之助, 27), 이 두 명은 지난해 9월 2일에 조선인 변용참(29)을 불량자로 오인하여 살해한 사건은 동경 지방재판소 야마자키(山崎)재판장이 심리하던 중, 14일 오전 11시 반에 두 명 모두에게 징역 1년의 판결을 내렸다.

 

법률신문(法律新聞』(1924년 3월 18)

(조선인을 살해 한 10명 모두 집행유예)

지난해 9월 4일 아다치군 하나바타케마을 (府下南足立郡花畑村宇久左衛門新田337) 카나스기(金杉熊五郎) 외 9 명이 타쿠미다리(匠橋) 부근에서 통행 중이었던 조선인 한봉구, 박인도, 김사봉, 이원석, 이건재 등 5명을 살해 한 사건은 동경 지방재판소 미야기(宮城) 재판장, 호조(北条) 검사의 담당으로 심리 중, 10일에 다음과 같이 판결 선고를 하였다. 

징역 2년 : 金杉熊五郎, 三角三治

징역 1년 6개월: 片瀬良吉, 金杉與市, 北金杉仁一郎, 島権蔵, 

原田留五郎, 寺島治平, 星野千之助

징역 1년 : 星野金松, 이상 10명 모두3년간 형을 집행유예.

 

동경 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 (1924 5 4)

(8명의 선인 살인 판결 언도, 실형은 1)

 

대지진 당시 카츠시카군 아야세마을(府下南葛飾郡南綾瀬村)의 자경단 이토우(伊藤金次郎) 등 11명이 폭도로 오인하여 조선인 8명을 살해 한 사건은 동경 지방재판소 형사 3부 야마자키(山崎) 재판장 담당으로 심리 중에 있었으나, 3일 오전 11시 반에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2년 : 伊藤金次郎, 吉野市五郎, 田口精造, 

中山健治, 山崎辰吉, 友野清三, 林松次

징역 3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 岡田太郎, 山田竹三郎, 藤井浅次郎 

징역 6개월 : 荒木間重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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