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현장에서의 탈출과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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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현장에서의 탈출과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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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7.0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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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시노(習志野) 수용소에서 신홍식(申鴻湜)

신홍식씨(전라남도 광주, 1905~1994)는 19살 학생 때 도쿄 구단시타(九段下)에서 간토대지진을 겪었 습니다. 료코쿠(両国)의 육군 피복공장 터로 몸을 피했지만 위험을 느끼고 그곳을 빠져나갔습니다. 이 후 지바(千葉)의 도가네(東金)까지 도망갔지만, 자경단에게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도가네 경 찰서에 보호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나라시노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수용소에서는 도망치려 했던 중국인이 군인에게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수용소 내의 자치조 직에 관여했던 신홍식씨도 이 와중에 살해당할 뻔 했습니다. 2003년 8월에 발견된 헌병대의 자료에 의하면, 수용소 내에 조선어를 할 수 있는 헌병이 배치되어있 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수용소 및 인근 마을에서의 학살

9월 7일, 지바현(千葉県) 내 나라시노(習志野) 수용소에서는 인근 마을에 ‘조선인을 내어 줄 테니 받으 러 오라’ 고 알렸습니다. 마을 사람의 기록에는 ‘15명을 받아와서 각 구별로 배당했다’는 내용이 남아있 습니다. 8일, 9일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학살을 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을 받으러 오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다카스(高 津), 오와다신덴(大和田神田), 가야타시모(萱田下), 가야타카미(萱田上), 오와다(大和田)에서는 군대로 부터 조선인들을 받아 잔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지바현 후나바시에서는 9월 6일 조선인 박해를 금한 다는 계엄사령부의 삐라가 배포되었지만, 이들이 살해당한 것은 그 후 였습니다. - 군대가 조선인을 마을 사람에게 내어주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조인승(曺仁承)

조인승 씨(경상남도 거창, 1902~1984)는 1923년 1월에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8월에 도쿄로 건 너와 9월 1일에 간토대지진을 겪게 되었습니다. 1일밤 가쓰시카(葛飾)와 스미다(墨田)의 경계에 있는 구 요쓰기(四つ木) 다리 위에서 자경단에게 붙잡혀 다음날 아침 데라시마(寺島) 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는 구 요쓰기 다리 위와 데라시마 경찰서에서 조선인이 학살되는 과정을 목격했고, 자신도 위험을 겪었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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