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인, 1923년 간토(関東)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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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인, 1923년 간토(関東)를 걷다.
  • Mr.Kantou
  • 승인 2018.09.1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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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KANTOU DARK TOURISM

15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간토(関東)학살희생자 제95주기 추도식 한국방문단(단장 양진규 목사 - 이하 1923추모순례단)"을 조직하여 95년 전에 희생된 재일동포 6,661명의 영혼을 위령하고 돌아왔다. 

 

1923추모단의 프로그램 기획과 진행을 맡은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대표이자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사회위원회 간토진상규명위원장인 김종수 목사(대전노회 통사위원장, 느티나무교회 목사)와 아힘나평화학교 조진경 교장은 8월 31일에 일본에 미리와서 이 곳에 묵으며 9월 1일에 가나가와 지역 추도식과 2일 지바 후나바시에서의 추도식 그리고 4일 사이타마의 추도식에 참여해오고 있었다.  1923추모단의 전체 일정은 한국기독교장로회 교회와사회위원회 간토학살진상규명소위원회(김종수위원장)와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의 협력으로 현지의 협조를 받으며 기획하였다. 1923추모단의 구성은 목회자 8인과 신도7인으로 구성되었다.    

본진은 9월 6일에 도착했고 재일본한국 YMCA에 여장을 풀었다. 이 곳에서 2.8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고, 그 여파가 3.1일 조선의 파고다공원에서 그리고 4월에 한(조선)반도 전역에서 만세소리가 이어져 나갔으니, 이 장소가 갖는 의미는 훗날 자연재해를 국가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삼아 간토조선인학살시건을 야기시켰으니 결과적으로 무관하지 않은 장소인 셈이다.   

 

함께 참여한 재일한국 목회자들은 95년 전 간토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추모단을 조직해 참여한 일에 대해 지금까지 없던 일로서 매우 의미있게 평가하였습니다.

KCCJ의 간사장이신 김병호 목사는 태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오사카 교구의 교회들을 시찰하는 도중에 추도예배에 참여하여 한국방문단을 격려해 주었고, 향 후 간토학살문제에 대한 교회의 노력에 공감하였습니다.

첫 날 저녁, 도쿄에 사시는 재일한국기독교단 소속 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윤광호목사의 사회로 학살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예배를 드리며 김종수 위원장은 역사의 광풍 속에서 태풍의 눈이 되어 거대한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역사의 중심을 잡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메시지를 선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A4pIuwhUw&feature=youtu.be

기장총회 총무인 이재천목사께서 준비하신 저녁성찬을 나누며 교류회를 가졌다.

둘째날인 7일에는 재일동포4세 아이들이 다니는 가나가와의 한 조선학교를 방문하여 민족교육의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과 교원과의 대화를 통해 해방이 되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게 된 재일동포들에게 일본정부는 여전히 차별과 배제의 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그리고 민족적 혐오감이 배태된 재특회 등 우익단체들의 헤이트스피치를 방조해오고 있는 현실의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해방 직후부터 조선인들의 민족교육의 의지를 꺽어버리려 조선학교 대탄압을 했었고, 일본에서 조선학교학생들의 교복인 치마저고리를 찢기는 등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학부모가 된 학교졸업생들의 학교사랑, 그리고 민족교육에 대한 자부심, 재일코리안으로서 일본에서 살아가는 자긍심이 지금까지 민족교육을 지켜오고 있는 힘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힘주어 말하였다.

8일, 오전에는 신주쿠구(新宿区) 쇼쿠앙도리에 있는 고려박물관에 들러 간토전시회에 참여한 후, 도쿄도부흥당 옆 조선인학살추도비가 있는 요코아미초공원으로 향했다. 이 공원이 생기기 전 1923년에는 이 곳에 일본 군인들의 군복을 만드는 피복공장이 이었고, 이 공장에 조선인노동자들이 상당수 일하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던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운 11시 57분이라 집집마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불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진으로 인해 땅이 갈라져 솟구치고 내려앉으면서 불똥이 피복공장에 날아들어 불이 삽시간에 번져 이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맹렬한 불길에 타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지진으로 인해 죽은 이재민들의 유골이 이 곳 도쿄도부흥당에 안치되어 있다.  이 부흥당에는 또 다른 유해들이 있는데 1945년 3월 미국에 의한 도쿄대공습에서 희생된 유해들도 안치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간토대학살의 희생자가 된 조선인들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유해들이 합사되어 있다. 이들은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일본권력의 계략으로 유언비어가 전국적으로 유포되고 이를 기정사실화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여, 순식간에 이주노동자와 유학생들로 이 곳에 살던 조선인들을 하루아침에 황제의 적으로 만들었고, 산업시설을 폭파하고, 마을공동체를 파괴시키려 우물에 독을 타고, 가정공동체를 파괴하려 강도와 강간범으로 만들어 사나흘만에 6,661명이나 되는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추산)  학살된 조선인들의 사체는 같은 동포를 불러다 기름붓고 불에 태워져 지진의 희생자의 유해와 합사된 채 이 곳 도쿄도부흥당에 남아 있다.  이 곳에 일조협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간토조선인학살희생자추도비가 있다. 

한국의 1923추모단은 총련 산하 강제연행진상조사단의 량대륭 선생을 만나 추도비 앞에서 함께 머리 숙여 추도하며 김영진 목사의 사회로 홍기원 목사의 기도로 식민지 백성의 아픔과 고난, 그리고 희생된 조선인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발걸음을 돌려 같은 스마다구에 있는 아라가와로 향했다.

아라가와 강변에 군대에 의해 학살된 조선인을 기리며 증언자들이 하나같이 가리킨 교각 아래에서 수십년 째 조선인학살희생자 추도회가 열리고 있다.  올 해는 특별히 한국과 중국에 있는 유족들이 초청되어 인사를 나누었다. '재일동포 가수 박 보'의 '봉선화'와 임진강은 추모객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길 건너편에 시민들의 크고 작은 정성들을 모아 2009년 추도비와 추도공간이 만들어졌고, 일본인이 세운 추도비 중에서 학살의 주체(일본정부, 군대, 경찰, 자경단)와 학살 대상(조선인, 중국인, 일본 사회주의자)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추도비를 찾아 희생자를 추도하는 행렬은 정말 길었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녁 우리는 또 다시 쇼꾸앙도리에서 오랫동안 한국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장을 만나 익숙한 한국음식을 먹고,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헤이트스피치에 대한 자세한 경과를 들려주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사장에게 닥친 시련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의 장로인 이명박대통령의 독도방문과 일본 아키히토 텐노에게 사죄를 요구한 사건 직후였다. 이래저래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민족감정을 이용하는 권력가들의 꼼수는 예기치 못한 역사적 바람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미친 광풍이 되어 가장 잔혹한 폭력인 제노사이드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길 건너편에 시민들의 크고 작은 정성들을 모아 2009년 추도비와 추도공간이 만들어졌고, 일본인이 세운 추도비 중에서 학살의 주체(일본정부, 군대, 경찰, 자경단)와 학살 대상(조선인, 중국인, 일본 사회주의자)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추도비를 찾아 희생자를 추도하는 행렬은 정말 길었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9일 아침, 량대륭씨가 하루 우리들의 가이더가 되어 버스를 몰고 왔다. 그동안 복잡한 일본 열차를 타고 짧지않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지바의 일정은 대절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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