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비 탁본은 일본 시민들의 기억을 한국 시민들에게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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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비 탁본은 일본 시민들의 기억을 한국 시민들에게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 김종수
  • 승인 2017.06.06 0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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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은 기록의 재생이다. 

재생의 의미는 기억이다. 

기억하려는 것은 잊지 말자는 것이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대표 김종수)는 올 해의 프로젝트로서 간토(関東)학살현장에 세워진 조선인 추도비를 탁본하기로 하였다. 지난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6박7일 동안 도쿄 아라카와 추도비, 사이타마 강대흥 추도비, 지바의 마고메 공원 추도비, 그리고 관음사에 세워진 총 4기의 추도비를 탁본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이번 탁본팀은 한신대 국사학과 탁본동아리 선후배로 구성되었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강산 사무국장은 한신대학 국사학과 동문들 중 채탁(採拓)활동을 오랫동안 해 오고 있는 전문가들을 초빙하였다. 김충현(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어원선(한신대학교 박사과정), 김강산(성균관대 박사과정)과 현재 탁본동아리 반장인 이우창(한신 한국사학과 3학년)이 참여하였고, 통역에는 이혜린(성균관대 박사과정)님이 참여하였고, 김종수 1923대표가 전체기획과 준비를 맡았다.

도쿄 아라카와 강둑 너머에 [봉선화회]가 세운 추도비가 있다. 이 추도비는 일본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추도비로서 다른 추도비에는 학살자 및 학살희생자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애매하게 기록하였지만, 이 추도비에는 일본의 군대, 경찰, 민간이 조선인, 중국인,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했다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1923년에 일어난 조선인학살사건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 사건의 기록물도 기억을 재생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도 없는 실정이다. 간토(関東)조선인학살사건을 한국 사회에 널리 알리고 국가차원에서 학살 희생자의 신원을 확보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촉구하는 운동을 시작한지 올 해로 10년이 된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는 지난 19대 국회에서 특별법제정을 촉구하며 여야의원 103명의 동의로 발의된 특별법이 통과되기를 바랬지만 법사위에 조차 상정되지 못하였다. 시민연대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사건발생 100년이 되는 2023년까지 한국정부가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6년 후면 사건발생 100주년이 된다. 조사를 하고 그 결과로서 정부가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일본에서는 대표적 학살현장이었던 도쿄, 요코하마, 지바, 사이타마 등에서 학살을 기억하는 단체들이 상시적으로 추도하고 조사하는 활동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이 단체들이 지난 2010년 9월에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을 발족하였다.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이 출발하는 날, 야마다쇼지 공동대표께서 이 모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이 세운 추도비, 연구성과, 각종 증거자료, 그리고 2003년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총리에게 권고하기까지 그 근거가 된 수많은 자료들을 증거자료로 삼아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기 시작해야 한다. 이 단체에는 조선인학살사건을 일본의 학계의 연구주제로 끌어올린 재일사학자 강덕상 선생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일본 간토연구자 야마다쇼지 선생 등의 연구자와 각 지역의 시민단체 대표자들이 활동하고 있고, 차세대 연구자인 동시에 유일한 간토학살을 연구하는 다나카마사타카 교수가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그런데 연구자 및 활동가들의 연령대가 이미 80대를 넘어 90을 바라보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 분들이 사건발생 100년이 되는 2023년까지 과연 살아계실 분이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다. 그간 지바의 조선인학살을 목격했던 당시 10세의 야끼가야타에코를 비롯해 도쿄조선대학교의 금병동 선생이 타계하였고,  최근에 학살희생자들로 밝혀진 한국의 유족들도 유명을 달리한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이타마에 세워진 강대흥 추도비. 200여 기에 달하는 추도비 중에 학살희생자의 이름이 기록된 두 기 중 하나이다.

일본정부는 지난 달 초에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는 답변서를 각의(국무회의) 확정했다. 그러나 이 말은 '적당한 때'가 되어 한국정부가 '유감의 뜻 정도'를 요구하면 할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린다. 그 이유는 지난 2016년 9월 NHK에서 사이타마에서 있었던 민간 자경단이 학살한 조선인 강대흥 희생자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는데, 학살이 있었던 도쿄, 요코하마, 지바 등 일본의 군대, 경찰 등 국가조직이 가담했던 학살사실을 덮고 민간에 의한 학살만을 보도한 것이 차후에 야기될 국가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함으로 보여졌다. 즉 국가의 책임을 민중들에게 덮어씌우고 국가는 유감표명만 하겠다는 것으로 읽혀졌으며, 일본 정부의 '유감표명의 예정'은 한국정부의 요구가 구체적으로 시작되면 고려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진다는 의미이다. 물론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지바 마고메공원에 세워진 추도비. 남과 북에 단독정부가 세워지기 전, 일본의 조선인의 권익을 위해 세워졌던 재일조선인연맹이 세운 추도비로서 모든 추도비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역시 학살주체와 학살희생자가 명시되어 있다.

1923한일재일시민연대는 사라지는 기억, 없애려는 기록, 지금도 계속되는 코리안제노사이드의 원점이 되고 있는 간토조선인학살사건을 현재화하기 위해 기억과 기록을 재생하고자 추도비 탁본을 기획하였다. 이번에 탁본을 해 혼 추도비 중에 재일조선인들이 세운 마고메공원에 있는 높이 3.1M의 거대한 추도비와 도쿄 아라카와 강가에 [봉선화회]가 세운 유일한 간토학살기록관 옆에 2009년에 세운 작은 추도비의 비문을 기억해야 한다. 그 비문에는 학살의 주체와 학살된 사람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희생당한 동포에 대한 슬픔과 억울하게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추도비는 일본에서 살아온 민중들의 기억이고, 추도식은 기억의 재생을 위한 의식이다. 이 기억과 의식, 그리고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묻기 위한 근거로서 가장 상징적인 추도비를 한국에 가져오려는 그 첫 시도가 탁본이었던 것이다. 

지바 관음사에 있는 추도비. 연극인 故김의경 선생의 제안으로 심우성 선생이 총괄진행하여 세운 보화종루 옆에 세워진 추도비이다. 이 비는 일본 군대가 며칠동안 밤아다 민간에게 학살용으로 조선인들을 내어 주었고 지역자경단들이 학살에 참여하였다. 후에 마을에서 추도비를 세웠다.

이번에 탁본 과정을 이끌었던 김충현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옮겨본다. 

김충현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관련 탁본을 마치며>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집사람이 일본으로 탁본을 좀 다녀오면 어떻겠냐며 물었을 때 그저 좋다고 했다. 며칠 아무 생각하지 않고 예전 학부 때 처럼 탁본이나 뜨고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갖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탁본반 후배 둘과 함께 탁본을 의뢰한 시민단체 관계자인 후배를 만나 사전 설명을 들을 때 까지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우리가 채탁하던 비석들은 대개 조선시대 것이었고 이번은 해방 이후 현대에 세워진 비석들이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관동대지진에 대한 배경지식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저 조각의 기억과 이미지만이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둘째날부터 채탁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은 깨졌다. 비석이 있는 장소에 갈 때 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과 관련한 그 지역의 일본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나와 맞아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활동을 했는지, 대지진 학살 사건 당시 어떻게 조선인들이 희생당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 등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 수와 방식은 무서울 정도였다.

이웃의 손에, 지역 자경단에 의해, 군대가 살해한 그 수많은 조선인들은 대개 이주노동자들이었다. 그저 돈은 벌어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고된 육체노동을 감내하던 그들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루머를 통해 폭도로 둔갑했고 목숨을 잃었다. 그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칼과 총이었다. 칼로 베어 죽임을 당할 것인지 총을 맞고 죽임을 당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던 그 순간의 느낌을 어떻게도 짐작할 수 없다. 이리저리 끌여다니며 두둘겨 맞다 지쳐 죽었던 그들의 고통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화" 나 혹은 "충격", "미안함"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화가나진 않았다. 이번 탁본을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생각했던 내 스스로가 부끄러웠고 아직도 방치된 그들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사회에서 왕따와 린치를감내하면서 숨겨진 진실을 규명하고자 노력하는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고마웠다.

하루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인 오충공 감독님을 포함해 재일교포 세분과 저녁식사를 했다.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일본의 교포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거나 북한의 인민이었다. 그도 아니면 이미 망하고 없어진 왕조 조선의 신민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게서도 북한에게서도 충분한 보호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척박한 환경에서 끊질기게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며 내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에 답답하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말과 농담을 던졌다. 후한 식사대접을 받고 헤어지는 길에 한 분이 말씀하셨다.

"조국에 돌아가서 이 곳의 교포들이 씩씩하게 살고 있음을 알려주십시오."

일본의 교포들은 당당하게 그 곳에서 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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