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대학살에 비쳐본 일본 제국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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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에 비쳐본 일본 제국의 어제와 오늘
  • 이진희 (미 이스턴일리노이대 사학과 교수)
  • 승인 2015.10.0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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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년 만에 확인된 한인 희생자의 두 개의 묘 -

70년 전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고, 일본의 패전은 전쟁과 억압에 지친 식민지와 “황국 신민”의 해방, 곧 일본 제국의 해체를 의미했다. 그러 나 1945년 열한살 어린이로 홋카이도에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김 외한 할머니는 그후 70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입에 담기조차 두려운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정어린 사죄와 보상을 받기는 커녕 이미 드러난 공권력에 의한 일본제국의 범죄 사실조차 부정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며 돌아가셔야 했다. 임종에 앞서 김 할머니는 “그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도움을 주신 사회에 죄송한 마음”이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올 6월 한달 동안만도 김 할머니와 같이 생존해 계셨던 “위안부” 피해자 중 세 분이나 청산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가 할퀸 육체적 ‧ 정신적 고통 가운데 타계하셨다. 1)

  • 1) “일본 위안부 피해자 김외한 할머니 별세… 생존자 51명”, “같은 날 위안 부 피해자 2명 별세… 50명만 생존”, “위안부 피해자 김연희 할머니 별세… 생존자 49명만 남아” 연합뉴스』 2015년 6월 11일, 12일, 25일자. 

최근 한일 관계를 뜨겁게 달군 또 하나 의 이슈, 일본 근대 산업 시설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논란에 있어 서도 신청 건에 대한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최종 결정 순간까지도 아소 탄광을 비롯한 해당 산업 시설에서 자행된 수만명의 노예 노동자(slave laborers)와 연합군 전쟁포로에 대한 일제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 침묵한 채 세계유산 등록을 추진한 일본 정부를 향한 비판의 소리가 국내외로 쏟아 져 나왔다.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일본의 산업 시설 중 다수가 강제 징용 의 장소로서 수많은 한인들을 비인간적으로 착취한 시설들이었다. 이같은 돌아보지 않으면 안될 시설들에 얽힌 일본 제국의 역사상은 배제한 채 세계 인류의 유산으로서 기념하기를 주장해 온 일본 정부의 자세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선정 원칙은 물론 인간의 존엄성과 양 도 불가한 기본권을 중시함으로써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로 결의한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정신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2)

  • 2) “미 하원 연명서한 ‘전쟁포로 반영 안 된 日세계유산 등재 반대’”『연합뉴 스 2015년 7월 4일.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한국이 나 라를 찾은지 70년, 일본과 한국이 국교를 회복한지 50년 후의 일이다. 이러한 걷힐 줄 모르는 제국의 그림자를 반추해 볼 때, 오늘날 과연 일본 제국은 해체되었고 우리는 식민 지배의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것일까?

 

Ⅰ.“전후일본”이라는 개념의 실효성

 

종전 직후 1945년 가을의 제국의회를 시작으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전후 처리”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승자 연합군에 의한 불완전한 전쟁 범죄 재판과 병행해 일본의 스스로의 손으로 전쟁 책임을 검증하겠다며 설 치한 “대동아전쟁조사회”는 결국 “국민의 반성을 촉구한다”는 문구를 각의 결정으로 빼버린 채, 전쟁의 책임이나 근본 원인이 아닌 패전의 경과를 조사한다는 식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3)

  • 3) 波多野澄‘,「서문」国家と歴史 中 公新書, 2011. 

팽창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로 무장하고 전쟁과 침략을 통해 열강의 반열에 오르고자 했던 메이지 시대 (1868-1912)의 정신을 계승하기라도 하듯, 패전이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 서도 일본의 많은 중심 지도자들은 “식민지 시혜론”과 “근대화 공헌론”에 의 신봉을 멈추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전쟁 상황 등에 힘입어 1950년대 중 반에는 이미 정부의 경제백서를 통해 “もはや「戦後」ではない”, 즉 “이제 「전후」는 없다”고 하면서 더이상 전쟁의 폐허를 헤쳐나가야 하는 “전후”의 상 황을 넘어섰음을 선언하리만큼 성공적 경제회복을 이끌어냈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냉전의 세계 질서 하에 반공 경제대국으로 재편된 전후 일본은, 전쟁과 식민지배의 폐해를 눈앞에 두고도 메이지 시대 이래 추구해온 부국강병, 산업화, 근대화 지상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보다는, 눈부신 전후의 경제 성장을 등에 업고 식민지주의와 일본 제국이 갖는 의미 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때로는 향수어린 동경마저 간직한 채 식민지배 폭력 을 정당화하는 논리들을 불식시키지 못해왔다. 그 결과, 한일 예비회담과 기 본조약 협정 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1970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침략 전 쟁과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과 불법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일본 제국의 아시 아 근대화에의 “공헌”이라는 발상을 전후 일본의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은 채 아시아 각국과의 배상 및 보상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즉 전후의 경제 “복구” 수준을 넘어서 경제 원조를 중심으로 하는 각종 협정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제국의 전쟁책임에 대한 “법적 해결”을 “완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1980년대 들어 역사교과서 문제나 정치 지도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사건을 통해 근대 일본의 “과거”를 둘러싼 이웃국들과의 논란이 빈번 해졌으나 여전히 철저히 검증도, 설명도, 성찰도 되지 않은 일본 제국의 폭 력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요원한 상태이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이웃국들과 관련된 역사 교과서 부분의 기술에 있어서는 “국제 이해와 협조 의 견지에서 필요한 배려”가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근린제국조항” (1982) 을 일본 정부는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쟁과 식민 지배의 현실에 서 나타난 야만성을 직시 대면하는 성찰의 결과가 아닌, 일본국의 “명예로 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시혜적이고 얄팍한 “배려”의 시도로 제국의 폭력 에 뿌리를 둔 주변국들과의 “과거사” 갈등에 대한 해결책으로서는 역부족이 었다. 즉 일본 제국과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의미에 대한 내재적 의식상의 혼란이 안으로 밖으로 돌출되면서 급기야 외교문제로까지 불거지게 된 꼴이 고, 이러한 식민주의와 침략 전쟁의 잔재는 떨쳐버리고 싶은 쇠사슬과 같은 “전후”의 불안정한 상태를 완전히 청산하고 떨쳐버릴 수 없어, 전전/전중/전 후 그리고 또 전후라는 “전후 일본”의 연속 가운데 1990년대를 맞게한 것 이었다. 

이제 쇼와천황도, 베를린 장벽도, 구소련도 사라졌다. 일본은 샌프란시스 코 체제에 기생해 세계 최강의 군사경제대국인 미국의 조력자로서 세계 2위 의 경제력을 자랑하며 제1세계(The First World)의 준멤버라는 냉전시대 일본의 위상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전후 일관되게 유지해온 55년 자민 당 체제가 흔들리고 일본의 경제력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사그러져 갔으며, (반)식민지 또는 위성국의 입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제3세계의 경 쟁력과 목소리가 커져가는 가운데 미국 주도의 배타적 세계 질서의 주도권 은 흔들리고 다중심 질서로 개편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탈냉전 시대다. 그 러나 탈냉전 시대에 들어섰다고는 해도, 일본은 여전히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조약으로 군사력이나 정치외교상의 온전한 독립이 불가능한 냉전 구도 의 사슬에 묶인 채, 국력 성장에 힘입은 탈식민지적 정체성 확립 노정에 선 주변국들로부터 제기되는 과거 일본제국의 폭력에 대한 고발은 강도를 더해 가기만 한다. 그간 냉전이라는 보호막에 감추고 묻고 넘어갈 수 있었던 강 제노동, 성노예제도, 식민지 대량학살, 대량살상 화학무기를 비롯한 각종 비 인도적 집단 범죄와 국제법 위반에 대한 심도있는 검증이 요구되게 된 것이 다. 사죄와 배상이 아닌 “경제원조”나 “근린제국조항” 등의 편법으로 아시 아의 구성원들과 화합을 시도했던 전후 일본의 전략은 탈냉전 · 탈식민지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명예로운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 게 되었다. 기본적인 신뢰조차도 얻지 못한 상태를 인지하고 전후 처리에 종 지부를 찍고자 시도한 “항구평화조사회설치”와 같은 초당적 법안(1999)이라 는 것도 마련코자 해봤지만, 일본 내에서조차 널리 공유할만한 원폭과 패전 에 다다르기까지의 제국과 전쟁이 갖는 기본적 의미 자체에 대한 전반적 동 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던 만큼, 혼란스런 “전후일본”의 국내 상황의 맥 락 속에서는 불발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처리”되지 않은 “전 후시대”는 일본의 과거가 아닌 바로 현재이고 미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청산되지 못하고 탈냉전 ‧ 탈식민시대로까지 연장되어온 이 “전 후일본”이라는 시대착오적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무엇이 넘어서 지 못하는 냉전적, 식민지주의적 역사 인식을 지속시키고 있는가? 오늘날 불거져 나오는 근대 제국의 폭력에 대한 검증 요구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오늘날4) 어떤 식으로 구태연하게, 그러나 강도와 나름의 “논리”를 더하여 이처럼 식민주의 범죄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구시대적 역사인식과 수정주의 를 재생산하고 있는가? 다음에서는 이와 같은 식민지주의와 냉전주의 영향 하에 성립되고 유지되어온 전후일본의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필자가 오랜기간 연구해온 아시아-태평양 전쟁 이전의 “평화”시기에 감행 된 일본 제국의 무차별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인 간토대학살 (1923)을 살펴 보고자 한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 과거가 한인과 일본인 간 상호 어떠한 영향을 끼쳐왔는지, 더 나아가 이와 같이 증거 소멸 이 불가능한 제국의 폭력 범죄에 대해서조차 거듭되어온 역사적 사실 부정 과 왜곡을 둘러싼 이웃국들과의 갈등의 악순환, 또 이로써 발생하는 부정적 이고 소모적인 국내외의 동력을 어떻게하면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그 방향과 가능성을 시론적으로 모색해 보고자 한다.

  • 4) 永原陽子,「戦後日本の戦後責任: 植民地 ジェノサイドをめぐる論争を手がかりに」 歴史学研究 921 (2014. 8), 1-22. 

 

Ⅱ. 간토대학살과 한인 피살자의 묘

필자가 일본 제국의 심장 도쿄 ·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방에서 발생한 1923년 9월의 대규모 한인 학살 사건5)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15년쯤 전 요코하마에 장기 체류하며 읽기 시작한 향토 사료들과 의 만남이었다.

  • 5) 한국에서 “관동대지진”으로 널리 알 려져있는 “관동 (간토)” 지방은 도쿄 와 요코하마를 포함한 일본 동부 지 방을 일컫는 말로, 도쿄도, 가나가와 (神奈川)현, 사이타마(埼玉)현, 지바 (千葉)현, 군마(群馬)현, 도치기(栃 木)현, 이바라키(茨城)현에 이르는 간토(関東) 일대를 가리킨다. 1923 년의 지진 및 그에 따른 화재 등으로 십만명을 웃도는 사망자를 낳은 전체 적 재해상을 통괄하여 일본에서는 일 반적으로 “간토다이신사이”(関東大震 災)로 부른다. 본고에서는 서명이나 사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유 지방 이름의 발음을 살려 “간토대지진”으로, 또 재 해 직후 반한 (反韓) 유언비어와 더 불어 발생한 일본 관민에 의한 대규 모 한인 학살 사건을 “간토대학살”로 일괄 표기하기로 한다 

흥미롭게도 일본 제국의 행정 ‧ 입법 ‧ 사법부서의 ‘공식’문서 에 등장하는 한인 학살 사건은 모순 그 자체였다. 대규모 자연재해가 있었다고는 하나 전쟁범죄도 아닌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일컫는 민주화의 물결이 일던 시기에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세계사적 규모의 민간 인 대량 학살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주체, 피해자 수와 이름, 사 체 처리, 사건의 종결 방식,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않았다. 70년이 넘도록 묻혀지고 덮여진 학살의 진상에 대한 진실의 실마리가 일본 의 아카이브 안 어디선가 반드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열심히 자 료를 모았다. 이러한 사료 조사 경험을 통해 거듭 확인하게 된 것은 제국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영향하에 구성 ‧ 보존되어온 문서 사료에 존재하는 행간과 공백을 치밀하고 복안적으로 분 석하고 재해석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이었다. 즉, 제국의 유물로 구성 된 식민사료관을 창의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을 통한 탈식민적 방법론을 통해 기존 제국 사료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건을 재구성 해가야 하며, 동시에 냉 전시대라는 특수막을 통해 소멸 또는 유지되어온 제국 시기의 기존 문서들 의 한계를 간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탈냉전적 관점에서 새로이 자료를 발 굴하고 총체적으로 해석해 식민지기의 역사상을 실증하고 이해해 가야 한다 는 뼈아픈 깨달음이었다. 

몇 해 후 도쿄대학교 한국조선문화연구실 체재 중, 2 ‧ 8 독립선언의 시발 점 등으로 유서깊은 도쿄 스이도바시 근교 재일본 한국YMCA회관에서 간토 대학살에 대해 수십년간 연구해온 일본인 연구자 야마다 쇼지 선생을 뵙게되 었다. 그는 일제와 국가 권력 하에서 행해진 종군위안부, 강제 연행, 나병 환 자 강제 수용 문제, 정치‘범’에 관한 연구 등, 직시하지 않으면 아니될 근대일 본사의 부끄러운 과거를 검증 분석해온 연구자이다. 선생은 일본 각지에 보 존되고 있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선인학살 피해자의 추도비를 찾아다니기 시작한 초엽, 그러니까 1980년대 초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 사이타마시 소메야(さいたま市 染谷)의 죠센지(常泉寺) 사원 내 묘지에 있는 강 대흥(姜大興)의 묘 앞에 섰을 때 갑자기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강에게도 조 선에 육친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향 육친을 생각하며 어떠한 기분으로 죽어갔 던 것일까. 또 고향에 계신 육친은 돌아오지 않는 그를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을까. 강은 어디로부터 이 소메야로 오게되었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소메야 주민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의 소지품에 이름이 적혀있었 던지 이름만은 묘비에 새겨져있다. 그러나 소메야 사람들은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고향의 육친에게 전해졌을 리가 만무하다. 이 때 학살된 조선인 대부분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필시 몇만명이나 되는 조선의 육친들은 일본에 건너간 부모 형제가 귀국하기를 헛되게 기다리다가, 그들이 죽게된 장소조차 알 수 없는 그 슬픔과 원한을 안고서 긴긴 세월을 보냈 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강의 묘 앞에 섰을 때에서야 처음으로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 있어서 이 묘비와 추도비를 찾아다니는 일은, 죽은 자와 그 유족이 가져야했던 아픔을 내 자신에게 새겨넣어가는 일종의 통로가 되었다.6)
  • 6) 야마다 쇼지, 이진희 역, 관동대지 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서울: 논형, 2008, 235-236.

선생의 이러한 자성의 소리에 감동을 받았던 만큼 나를 괴롭힌 생각은 소메야의 지역민들을 비롯한 일본의 후예들에게는 미흡하나마 간토대학살 사건에 대해 돌아보고 아로새길 수 있는, 이제껏 알려진 것만도 수십 개에 달하는 한인 학살 사건 관련 묘비와 추도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7)

  • 7) 일본의 간토 지방 각지에 존재하는 간토 한인 학살과 관련한 현존 전전, 전후시대 세워진 추도비에 관한 소개 는 위의 책 1장 참조. 

 타깝게도 식민주의 영향 아래 검열 배제되고 왜곡 미화된 채로 남겨져 있는 과거 식민지 관련 일본 내 문서 사료군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어느 구석 에 어떠한 형태로든 남아있기만을 바라며 한인들 자신들에 의해 남겨진 이 1923년 대량 학살에 대한 흔적을 15년 이상 찾아 헤매온 필자는 이 사건의 희생자를 추도하는 시설이나 공공의 기억의 장소를 한국에서는 단 한군데도 찾지 못했다. 8)

  • 8) 한국 내 간토대학살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과 기억의 노력은 오랜동안 빈약 하다. 필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 본서의 번역본과 학술회의의 공동저 술집을 제외한 간토대학살을다룬 한 국 내 개인 연구자의 심도있는 단행 본을 단 한권도 찾지 못했다. 부끄럽고 놀라운 사실이나, 필자의 Instability of Empire: Earthquake, Rumor, and the Massacre of Koreans in the Japanese Empire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2004)는 현재까지 이 주제를 다룬 세계 최초 그리고 유일한 박사학위 논문이다. 노주은의「관동대지진과 일 본의 재일조선인 정책: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진재처리’과정을 중심 으로」는 필자가 아는 한 간토대학살 에 대한 역사 검증을 시도한 국내 최 초의 학위논문이다 (연세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2007). 최근 이 주제에 관 한 심도있는 한국 최초로 국제학술회 의를 주최한 동북아역사재단은 발표 된 귀한 연구들을『관동대지진과 조 선인 학살 사건』로 묶어내었다 (2014).

당시 일본에 머물던 조선인들은 유학생을 제외하곤 대부분 제국의 언 어를 알지 못했다. 1920년대 초 일본 내 한인의 절대 다수는 노동자인데 다가 작업 현장도 고립된 험지인 경우가 많아 피살자의 이름과 신상 기록 이 제대로 남아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방화, 강 간, 폭동, 약탈, 투독 등의 범죄 혐의를 쓰고 계엄령 아래 군대, 경찰, 민간 자경단에 의해 집단 학살을 당했던 배후에는 놀랄만큼 신속히 또 조직적 으로 퍼져나간 유언비어의 영향이 컸다. 이는 피압박민인 한인들이 언제 어떻게 일본인에게 복수할지 모른다는 내재된 공포감, 죄책감, 긴장감이 당시의 식민 지배 구도 속 일본 제국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재해와 같은 위기 상황을 맞아 학살의 동력으로 전환되었던 것이었다. 강대흥과 같은 한인들이 어떤 계기로든 “후테이 센진” (不逞鮮人)으로 명명된 순간, 그는 이미 존엄한 한 인간이기보다 일본의 이익에 반하는 또는 그 경영의 효율 성을 떨어뜨리는 “제국의 적”, “공공(公共)의 적”으로 기호화되어 “처분” 해도 된다는 의식이 정부, 군대, 경찰 그리고 일반인들에게까지도 퍼져있 게 된 것이었다. 9)

  • 9) 일본제국에서의 “불령선인”에 대한 계보에 대해서는 졸고 “‘Malcontent Koreans (Futei Senjin)’: Towards a Genealogy of Colonial Representation of Koreans in the Japanese Empire,” Studies on Asia IV (3:1), 2013, 117-187 참조. 또한 필자는 간토대 학살 당시 드러난 제국의 지배민과 피지배민이 동시에 겪어야했던 이러 한 이중의 심층 불안 현상을 “식 민 폭력 역류의 환영” (“imagined Inversion of colonial violence”)이라 졸 고 (2004) 제2장에서 명명한 바 있다

이같은 상황 속에 이뤄진 학살 행위 후 그 피해자에게 인격체로서 이름을 부여한다든지 표정이나 얼굴을 기록해 두었기를 기대 하기란 어렵다. 10)

  • 10) 사아타마현 오사토군 요리이의 엿 장수로 행상을 하며 몇몇의 일본인 과 친분이 있던 구학영(김창)과 같 은 소수의 학살 희생자의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수많은 학살 관련 증언, 일기, 회고 담, 묘비, 관련 문서 등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에게는 대부분 이름이 기 록되어있지 않다. 이는 유족찾기와 진상 규명을 위한 희생자의 신원 확보에 큰 걸림돌이 되어왔다. 또 한 흥미롭게도 유사한 현상이 그림 과 같은 학살에 대한 비문서 기록 에 있어서도 얼굴의 눈, 코, 입이 생략되거나 개개인의 표정 등이 드 러나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림 에 의해 기록된 간토대학살과 관련 해서는 新井勝紘「”描かれた朝鮮人 虐殺論”その二―関東大震災80年 をむかえて」『隣人』17, 2003; 졸 고, The Massacre of Koreans through Paintings (The Great Kanto Earthquake 80th Anniversary Special Exhibition Booklet), Tokyo: Koryŏ Museum, 2003 참조. 

다행히도 피살자 강대흥은 사건 후 얼마 안된 시점에서 지역민들에 의해 학살 장소 근처에 묘비가 세워져 이름도 새겨지고 90년 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가 살해된 매년 9월 4일이면 이 곳에서 추도도 행 해진다. 11)

  • 11) 강대흥 학살 사건에 관한 연구는 사 이타마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현해탄 양측 간 평화와 우호를 목표로 만들 어진 일본인 시민단체인 일조협회와 함께 40년 이상 행해져왔다. 関東大 震災六十周年朝鮮人犠牲者調査追悼 実行委員会 編刊『かくされていた歴 史―関東大震災と埼玉の朝鮮人虐殺 事件―』増補保存版, 1987, 61; 関 東大震災五十周年朝鮮人虐殺犠牲者 調査追悼実行委員会 編刊『かくされ ていた歴史―関東大震災と埼玉の朝 鮮人虐殺事件―, 1974.

하지만 그의 경우도 그가 그리워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을 그의 조국에는 그가 폭도로 몰려 타지에서 한밤중에 고통스럽게 죽어간 학 살 사실의 진상을 규명해줄, 또 그를 애타게 찾았을 육친에게 이 사건에 대 해 알려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의 조국은 나라를 되찾았고 이제 세계 최 고의 부유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건만 대한민국은 그의 죽음을 기억하지도 그의 유골을 찾지도 않았다. 그의 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타마의 후예들에 의해 때로는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지금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 지켜왔던 것이다. 학살 후 92년이 지난 오늘, 과연 강대흥에게 조국은 있는가? 

나라를 빼앗기고 소작지를 빼앗겨 생존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까지 건너가 노동도 하고 공부도 했지만, 결국 유언비어의 대상이 되어 죽 임을 당하고 만 수천의 조선인. 그러나 학살의 사실 조차 감추어진 채 다시 한번 인식상의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 그렇게 억눌려 살아가던 피식민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국가와 더불어 집단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일본인을 만들고 만 일본 제국의 현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복잡 다 난한 순간 순간의 개개인의 선택과 사건에 대한 이해와 해석. 참으로 일본에 서 20세기 초를 살아낸 이들의 삶에 배어있는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넘나든 이들의 근대 제국의 경험은, 이제껏 축적된 한국사 일본사 속에서도, 그리고 세계사의 관점에서 본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지 대량학살의 연구에 있 어서도 오랫동안 외면되어온 가깝지만 요원했던 바로 우리의 과거이다. 이들 의 삶에서 드러나는 식민지주의와 냉전의 구도 하에 오랫동안 감춰져있던 한 일 근대사의 모습은 제국의 “과거”와 비인도적 폭력을 둘러싼 검증과 기억의 공방이 더더욱 거세어지는 오늘날 우리가 꼭 되돌아보아야 할 중요한 과제이 며, 이제부터 우리가 재구성하고 재해석해가야 할 일본 제국과 대일항쟁기의 총체적 역사상을 밝혀가기 위한 하나의 기점이다. 

 

Ⅲ. 피살자 강대흥의 또 하나의 묘

 

  • 강대흥(학살 당시 24세)은 지진과 조선인 폭동 등의 유언비어가 발생한 후 사이타 마현 경찰이 현내 조선인을 모아 이웃 지역인 군마현 등지로 이송하려던 과정에서 가타야나기무라(片柳村, 현 埼玉市) 소메야에 오게 되었고, 1923년 9월 4일 새벽 녘 이 지역 주민에게 학살당했다 한다. 당시 사이타마현에서는 고사카 내무부장의 지령에 의해 “불령한 무리”의 공격에 대비해 자경단이 결성되었는데, 가타야나기 마을에서는 자경단 결성 다음날인 4일 오전 2시경 마을 주민들이 강대흥을 타살 했다고 기록되어있다.12) 게다가 학살 후 마을 사람들은 오미야(大宮) 경찰서에 출 두해 계엄령 아래 행해진 일이었던만큼 관헌을 도와 조선인을 잡으면 무공 훈장13) 이라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중 두명은 실제로 “악한을 잡아 못된 짓을 못하 게 막았으니, 꼭 상을 받고싶다”고 자청하고 나섰다고 한다.14) 이 지역주민이던 고이즈미 사쿠지로(小泉作次郎)의 회고에 의하면 학살 “사건 관계자가 책임을 느 끼고 피해자를 동정하는 마음에서” 그해 사건 후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묘를 썼 고,15)2001년에는 새 묘비도 추가로 만들어졌다.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9월 4일에 는 매년 40-50명이 모여 추도식도 열고 있다.

 

  • 12) 関東大震災六十周年朝鮮人犠牲者調 査追悼実行委員会, 1987, 61;
  • 13) 금빛소리개(金鳶) 무공 훈장은 일본 의 뛰어난 군인에게 하사했던 훈장. 진무(神武) 천황의 동쪽 지방 정벌 (東征) 당시, 금색 소리개가 비상해 천황의 활궁 끝에 멈춰 천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신화에서 연유하 며, 1890년에 제정되었다.
  • 14) 『도쿄니치니치신문』1923년10월19일; 야마다, 2008, 110. 15) 関東大震災六十周年朝鮮人犠牲者調 査追悼実行委員会, 61.

 

1923년 9월 1일 토요일 점심 준비 시간을 즈음해 대지진이 발생한 후 강한 바람과 대형 화재로 진원지에 가까운 도쿄, 요코하마를 비롯한 간토지 방에서는 10만명에 육박하는 인명피해를 낳았다. 흉흉해진 민심을 잡고 위 기 상황을 틈탄 반정부 ‧ 반제국 세력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의 습격과 폭동에 주의하라는 내용의 전보와 안내문을 조직적으로 유포했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타거나 부서지지 않은 인쇄시설 등을 이용해 신문 등을 통해 보도되었고, 동시에 경찰, 군, 관공서, 그리고 이동하는 피난민 사이에서 말과 글을 통해 확산됐다. 이후 일본 민간인들은 군대, 경찰과 함께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 으로 보이는 이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강대흥도 대지진이라는 재 해를 겪고나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순간, 가타야나기 지역에 이르른 3일 자정을 넘어섰을 때 정부의 지시로 바로 전날 자경단을 조직했던 지역 민들의 분풀이와 학살의 대상이 되어 창과 칼로 큰 부상을 입고 아침 9시경 에는 급기야 사망하고 말았다. 16)

  • 16) 사이타마현 우라와 지방재판소 가 타야나기 사건의 피고 자경단에 대 한 재판의 기록 (1923.11).

일본 공권력이 총동원된 정보 및 이동 통제에도 불구하고, 재해 후 3주 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재해의 화를 한인에게 전가해 동포를 참살하고 1만 5천명에 달한다고 보고된 수용소 감금 한인들 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 외교담당 조소앙의 명의로 일본정부에 항의 서를 제출했다. 수용 한인을 석방하고, 한인 생사자에 대해 조사 공포하고, 학살 희생자에 대해 책임질 것을 묻는 내용이었다. 17)

  • 17) 독립신문 No. 164,1923년 9월 19 일.『독립신문의 기사를 통해본 간 토대학살에 대해서는 장세윤, 「관동 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독립 신문의 보도와 그 영향」, 사림 46, 2013 참조.

지진과 학살의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임시정부는 기관지인『독립신문』을 통해 그해 10 월 13일자(165호) 1면에 이미 학살자 수는 6,000명을 웃돌 것으로 보고했 고, 12월 5일자 1면에는 “재일동포 피학살 진상조사회”의 조사 결과인 “본 사 피학살 교일(僑日)동포 특파 조사원 제1신”을 실었다. 아수라장이 된 간 토지역에서 시체 썩는 냄새와 살기 가득한 조선인 학살 피해지를 찾아다니 며 동포 학살의 실태에 대해 조사하는 일은 일본어에 능숙했던 유학생 출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지진과 학살에서 살아남은 후 “재일본관동지방 이재 조선동포위문반”을 꾸려 피땀어린 조사를 행했고, 이에 힘입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독립신문의 사장 김승학에게 11월 중순까지의 조사 결과를 보 고하였다. 이를 통해, 강대흥 피살 사건이 일어났던 사이타마에서의 학살을 포함한 10월말까지의 1차 조사결과 및 1923년 11월 중순까지 추가 집계된 수를 더하여 적어도 6,661명이 학살되었음을 보도했다.

당시 간토 지역 내 한인 인구와 이후 보호 명목으로 수용된 인원, 식민 지 조선으로 돌아간 인원 등을 차감한 수 중 1/4만 학살당한 것으로 계산해 도 6,000명을 웃도는 결과가 나온다. 이러한 연유로 관련 연구자들은 지금 까지 발견된 모든 해당지역의 인구통계 등을 감안할 때『독립신문』에 발표 되었던 적어도 6,000명이라는 피해자 수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있 다. 그러나 당시 증언이나 신문 보도의 내용에 비해 실제로 피살자의 사체가 확인된 경우는 3,000을 넘지 못한다. 지진 학살 당시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재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를 맡고 있던 중 학살의 위협을 넘기고 도쿄의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동포의 피해자 조사에 착수했던 최승만 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피학살진 상조사회”의 결성 자체를 허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살 사실과 사체 유골을 태우거나 이장하며 감추기에 급급했다. 때문에 도쿄 조선유학생 학 우회,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재일천도교청년회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이들 한인 진상규명 단체는 이름조차 정부의 방해로 ‘위문반’으로 고쳐야 했 다. 18)

  • 18) 최승만,「일본 관동 진재 시 우리 동 포의 수난」극웅필경 최승만 문집, 김진영, 1970, 50. 

최승만을 비롯해, 변희용, 한현상, 박사직, 민석현, 이철, 이근무 등 당 시 조사에 직접 나섰던 한인들이 위험을 무릅쓴 학살 진상 조사 과정에서 경험했던 충격과 위험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리라. 도쿄 가메이도의 학살 등과 같이 관헌 주도의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진 경우, 사체를 한꺼번에 모 아 태우고 강둑에 암매장하는 등 조직적으로 학살을 은폐하고 증거를 인멸 하려 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자 수는 오늘날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목격자 증언을 포함한 위문반의 현장 답사 결과 3,000구 정도의 피살 한인 유해가 조사됐고,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학살 당시 희생 자의 이름, 나이, 고향 등을 포함한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까지도 기록된 바 있다. 19) 

  • 19) 남아있는 한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신상 정보는 산재된 경향이 있으나, 학살 실태 조사에 참여했던 재일 청 년들의 회고록과 일본외무성 및 총 독부 문서 중 소위 “불령선인”과 관 련한 치안 보고, 그 외, 김건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외로 집필 배포된 김 형규의 학살이라는 “불온문서” 책 자나 당시 한국과 일본의 신문, 또 한 도쿄의 한인 유학생들과 교류했 던 요시노 사쿠조의 기록 등을 통해 학살의 실태에 대한 대강과 희생자 조사 결과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들 남아있는 기록은 학살지와 피 살자 수가 중심으로, 수천에 이르는 피살자의 신상정보까지 포함된 총 체적인 문서 자료는 찾기 어렵다.

그들은 발로 뛰며 사체를 찾아다니면서 관헌에 항의했고, 이후 극심 한 경찰의 탄압 가운데 이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도하는 노력을 아끼 지 않았다. 20)

  • 20) 일본 정부의 검열과 집회 금지의 망 을 피하고자 때로는 간접적이고 완 곡한 내용과 형태를 띠며 마련된 한 인에 의한 추도회에 대한 소개는 이 진희,「관동대지진을 추도함: 일본 제국의 ‘불령선인’(不逞鮮人)과 추도 의 정치학」,아세아연구51:1 (2008), 53-96참조. 일본 내 진재 추도의 예와 수도 부흥 및 재건으로 학살 기억을 함몰해 가는 추도시설 소개 와 관련해서는 李眞姬, 2003 참조.

또한 조사에 참여한 한인들을 비롯한 경험자들에 의한 학살의 관찰과 경험을 소중한 회고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21) 그러나 아쉽게도 위문 반의 활동은 12월 25일자로 해산당하고 말았고, 22) 위문반 조사 등으로 파 악이 가능했던 학살 직후의 1차 조사 보고는 삼엄한 검열, “불온문서” 압수, 저자 체포 등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피살자의 신상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다.

  • 21) 한글, 일문, 중문, 영문 등으로 기록 된 현존 간토대학살의 체험 기록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최승만의 전게서 (1970)와「동경 YMCA 봉직할 때」 (나의 회고록』인하대학교출판부, 1985, 113-163), 또한 함석헌의 「내가 겪은 關東大地震」(씨알의 소리 26, 1973)와 죽을 때까지 한걸음으로(1996) 등이 있으나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기록을 통해 학살의 실상을 알리고자 노력했던 산재된 한인들에 의한 기록들이 있 다. 이제껏 일본의 식민 문서관이나 각 지역 내 발굴 자사료에 의해 큰 연구의 진척이 있었던 만큼, 한인 자신들이 경험한 바에 따른 사건 기 록을 제국의 맥락 안에서 발굴, 분 석, 활용하는 탈식민적 학살 실태의 연구는 시급한 당면 과제라 하겠다.
  • 22) 朴慶植,『在日朝鮮人関係史料集成』 第一巻, 三一書房, 1975; 147.

다행히도 지난 2013년 여름 주일한국대사관 건물 이전을 기해 발견된 “일본진재시 피살자명부”(日本震災時 被殺者 名簿, 109매, 290명 수록), “삼일운동시 피살자명부”(三一運動時 被殺者 名簿, 217매, 630명 수록), 그리고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日政時 被徵用者 名簿, 65권, 18,322매, 229,482명 수록)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이 중 “일본진재 시 피살자명부”와 “삼일운동시 피살자명부”에는 약 300명 정도의 학살 희생 자에 대한 전후 한국 정부에 의한 최초의 조사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널리 알려진 6000명을 넘는 학살 희생자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한국인의 명단이 이렇게 공식적인 정부 기록의 형태를 통해 알려지기는 처음이다. 국가기록원 소장의 이 3종 명부는 1953년1월9 일 접수된 정부 기록으로, 1952년12월15일 109회 국무회의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일회담 준비 등을 염두에 두고 일제에 의한 한국의 인적 물적 손 실에 관한 조사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특별히 삼일운동, 간토대학살, 그리고 강제 징용에 의한 피해자 조사가 정부 행정망을 통해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 여진다. 23)

  • 23) 김도형, 「관동대지진 희생자 명부의 내용 검토와 역사적 성격」동북아역 사재단 주최 청암대학교 개교60주 년 기념 재일코리안 연구소 국제학 술대회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문제 연구> 발표문, 2014.

현재 명부는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 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에서 검증 · 분석 조사 작업 을 하고 있다. 동 위원회의 2차에 걸친 명부 확인 결과, 2015년5월 현재 분 석 대상은 286명이며, 이 중 명부 외 확인된 7명을 포함하면 제적 등본과 현 지 조사 등을 통해 총 보고된 인원의 일부인 31명에 대한 간토학살 피살자로 서의 신원이 확인된 상태이다. 24)

  • 24) 오일환, “한국의 일제강제동원 관련 자료 현황 및 연구 방향,” 일제침탈 사 국제공동연구 워크샵 (동북아역 사재단, 2014. 7. 29), 201-202;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방문 인터뷰, 2015.6.2.

 이는 미미하긴 하나, 명부 작성 당시가 전국 적 행정망이 제구실을 하기 어려운 전쟁 중이었던 점 등을 감안할 때 임시정 부로 시작된 한국 정부의 간토대학살 진상규명 노력의 성과를 반영하는 것이 다. 총체적 학살 사태를 파악하는데는 불충분하고 정확도를 가늠하는데는 아 쉬운 면이 있지만, 학살 피해자의 이름, 나이, 출신지, 일본 내 학살지 및 학 살 방법, 또한 피살 신고 사실을 확인하는 “인정자”까지 기입된 매우 소중한 정부 기록이다. 특히 함께 발견된 3종 모두의 “명부”에 간토학살의 피해자로 보이는 기록이 혼재된 상태여서 피살 실태의 진상 규명과 유족을 찾는 노력 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값진 자료이다. 

  • 고향도 육친도 알 수 없던 사이타마 자경단 학살의 피해자 강대흥씨도 바로 이 “삼일운동시 피살자명부”에 같은 한자이름, 같은 나이로 보고되어 있다. 국가기 록원이 소장하고 2013년 말부터 일반 공개하고 있는 이 명부에 따르면, 그는 경 남 함안군 칠원면 유원리가 고향으로, 1953년 초 피해 신고 완료 당시 같은 고향 의 황몽백 씨에 의해 간토학살 피해자로 “인정”되었고, 역시 같은 고향 출신인 또 다른 피살자도 유족에 의해 간토지역에서 진재를 즈음해 피살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다만 강대흥의 학살 시기에 대한 이 기록의 내용은 부정확해 보인다. 하지만, 또다른 정부의 일제에 의한 피해 신고 문서 (2005년 접수)를 통해 한자를 포함한 이름, 나이, 고향의 주소까지 일치하는 동일인물로 보이는 기록을 대조 확인한 결과, 강대흥은 1898년 10월생으로, 유족에 따르면 1922년 일본으로 간 뒤 행방불명되었고, 강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고향인 경남 함안에는 유골 대신 초혼장을 넣은 가묘를 만들어두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결국, 야마다 선생의 짐작대로 학살 후 92년이 지나서도 강대흥의 죽음 은 고향의 육친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그 일본인 역사가가 가슴에 새겨 헤 아려보고자 했던 조선인 피살자의 사망 장소나 경위 또는 고향에 계신 강대 흥씨 육친의 돌아올 줄 모르는 24세의 식민지 출신 청년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은 “행방불명”상태로 기다리다 시신도 없는 가묘를 한국에 만들어두었 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강의 묘 앞에 섰던 야마다 선생의 부끄러움의 열배 백배 천배의 송구함이 그의 사후 92년이 되어 나타난 강대흥의 신원을 밝혀 주는 오래된 한국 정부의 기록물들을 마주한 내게 치밀었다. 일본 학살지에 마련된 “조선인 강대흥 묘”와 한국의 유족들에 의해 빈 채로 준비되어 있는 또 하나의 강대흥의 묘를 위해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아니 더 늦기 전에 무엇을 해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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