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자들이 남긴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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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자들이 남긴 이야기들
  • 김종수
  • 승인 2020.05.0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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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氏의 증언
자료제공 :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자료제공 :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신홍식 씨(전라남도 광주 출신 1905-1994)는 19살 학생 때 도쿄 구단시타(九段下)에서 간토대진재를 겪었다. 료코쿠(両国)의 육군피복공장터로 몸을 피했지만 위험을 느끼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도중에 여학생을 도와 이치카와(市川)로 데려다 준 후 지바의 도가네까지 도망갔지만 자경단에게 습격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도가네 경찰서로 보호를 요청하여 그곳에서 나라시노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에서는 도망치려 했던 중국인이 군인에게 사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수용소 내의 자치조직에 관여했던 신홍식 씨 본인도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2003년 8월에 발견된 헌병대의 자료에 의해 수용소 내에 조선말을 할 수 있는 헌병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들은 지바육군보병 교도연대의 병영으로 끌려 갔습니다. 교도연대는 특수 연대였어요…수용소에서 꽤 걸어갔는데 2, 30분 정도였어요. 군인이 혼자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뒤를 우리는 따라 갔습니다. 내가 가기 전에 한 사람이 곤욕을 치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도 그리 돼지 않을까 생각하며 따라 걸었습니다. 그러자 개 한 마리가 앞쪽에서 나타났어요. 앞서 가던 군인이 군도를 뽑아 들어 그 개를 두 동강 내더니 “사람한테 이렇게 하면 기분이 좋겠지?”라고 하더군요.
아마 교도연대가 수용소를 관리했었나 봅니다. 그 곳의 특무조장이 “당번을 정해서 식사하다니  자치조직을 만들던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어 봤어요.
“너 정말 운 좋다. 지금 큰일이야. 조선인 소동 때문에 큰일 났어” 정말 이렇게 믿고 있는 듯 했어요. 조선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넣고 날치기하고…
특무조장은 내게 “넌 운이 좋은 놈이야”라고 말했어요. 확성기로 이름이 불려 간 채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いわれなく殺された人々』
사진 위 :배소 제공

조선사람들을 수용소로 호송하는 군대, 군대는 무장을 하고 조선인을 호송했다. 
(『朝日クロニカル・20世紀2「恐怖・革命・関東大震災」』 - 사진 아래 왼쪽)
나라시노 수용소의 야마나시(山梨) 계엄사령관과 조선인(『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 - 사진 아래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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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간토대학살 속에서 살아 돌아 온 사람들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대표)

 

1923 간토대학살의 주 피해자는 조선인 이주노동자였다. 피학살 조선인 중에서 조선 유학생들은 자경단에 의해 경찰서와 수용소로 끌려가려 할 때에 하숙집 주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해 주었다. '내 하숙집 이용자'라는 일종의 신원보증을 했던 셈이다. 하지만 간토에 들어간 지 채 일년도 안되어 학살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이주노동자들이었다. 다수의 중국인들도 학살당했다. 그 이유는 조선인으로 오인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중국인도 이주노동자로서 불온한 사람들(노동자 계급투쟁조직-왕희천도 당시에 학살당함)로 권력자들의 가시같은 존재로서 언젠가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연구자들은 두 주장 모두 사실로 인정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일본인이 아니면, 더 나아가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심한 사투리를 쓰면 이주민이라고 간주하여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현장에서 살아남아 돌아 온 사람들 중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다. 그렇게 살아돌아온 조선인들의 후손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인들도 많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 돌아온 이들은 대부분 그 날의 학살에 대한 증언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간토대학살 이후 일본 정부가 취한 치안유지법으로 간토학살에 대한 말과 글, 그 어떤 표현도 법적으로 불허되었다. 

연구자들에 의해 당시에 조심스럽게 학살사건에 대한 숨겨진 증언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수용소에서 일본어를 현지인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신홍식씨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았고,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였던 기록들을 찾아내었다. 

오충공 감독의 두번 째 다큐멘터리는 신홍식씨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1923년 당시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함석헌 선생도 사건을 겪고 살아 돌아온 지 50년 만에 씨알의 소리를 통해 "내가 겪은 관동대진재"라는 제목으로 당시의 상황을 전하였다. 그 기록은 다음에 전문을 싣도록 하겠다. 

함석헌선생은 씨알의 소리 1973년 9월호에 처음으로 간토대학살사건에 대한 체험기를 실었다.
함석헌선생은 씨알의 소리 1973년 9월호에 처음으로 간토대학살사건에 대한 체험기를 실었다.

2009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유골을 발굴하여 추도하는 모임'의 회원이 자신의 회보를 보여주며 회보에 실린 그림을 자세히 보라고 하였다. 익숙한 화풍의 만화였다. 박재동화백의 그림기록이었다.  

박재동화백의 큰 아버지가 간토에서 살아서 돌아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그림을 그렸다.
박재동화백의 큰 아버지가 간토에서 살아서 돌아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기억해 그림을 그렸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자들의 기록을 찾아야 한다.  수많은 유학생들이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돌아왔거나, 간토에서 숨어지내며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 온 이들이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남긴 작품들이 여전히 도서관에서 혹은 후손들의 창고 속에 잠들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을 찾고 사료들을 해석하는 일은 역사연구자들만의 몫은 아니다. 문학가, 대중문화연구자, 일본관련 연구자, 종교연구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인문학 연구자들의 협력이 진실의 조각들을 맞추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학살 당시의 상황을 목격한 일본의 아이들이 남긴 그림일기는 그 날의 진실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타깝게 한국에서는 일본관련 연구자들이 그리도 많지만 번역서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연구자,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활동가들이 다른 일에 우선할 수 있는 지원을 당얀히 국가가 해 주어야 한다. 

행정직의 공무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에게 이 문제가 이슈화되어 관련법이 제정되면 예산을 배정할 수 있다고.......

요즘같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그리고 수많은 이슈 속에서 유독 이 문제가 대중들에게 부각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집중적 투자가 필요한 지 잘 알면서, 행정은 사민사회단체의 역량부족임을 지적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행정이 할 소리는 아닌 듯 싶다. 적어도 국가책임을 깨닫는 공직자라면. 

세계사적 제노사이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야될 사건임에도 여전히 역사의 공간에는 심지어 연구자들까지도 '간토대학살'이 아닌 '관동대지진'으로 이 사건명이 회자되고 있다.  오랜 시간의 침묵을 강요받게 된 이유는 일본 국가의 치안유지법의 두려움과 해방 후 친일잔존권력자들의 통치 속에서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음이 여러 이유들 중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어려운 역사적 공간에서 무언가를 통해 남기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들의 사료들을 찾아내어 어둠 속에서 진실의 촛불을 밝히려 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이어받도록 해야하는 일이 민주정부가 적극적으로 해야할 일이 아닐까?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것도 문제이고, 그러한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시민사회단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중적 이슈로 만들때기를 바라고 있다. 그 책임을 떠 안고 있는 필자는 열심히 다양한 개인미디어를 통해 알리고자 하지만 어디 대중매체(주요 방송사, 조중동일간지)에 비할 수 있겠는가?  설령 이 주제를 다룬다 하여도, 반일감정을 부추길 내용만으로 편집되어 소비되는 실정이기도 하다. 

[간토학살 100년 백서]는 학살의 이유, 학살의 과정에서의 일본정부의 책임, 그리고 일본 자경단의 책임, 그리고 추도활동을 방해하고 진실규명을 억압해 온 일본 우익들의 혐오범죄 등을 가감없이 다룰 수 있는 연구자, 진실규명활동가들에 의해 수집, 연구, 출판되어야 할 일이다. 이 작업에 국가가 책임있게 지원하기를 바란다.   (洙)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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