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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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
  • 김종수
  • 승인 2020.04.19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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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간토조선인학살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인승(曺仁承)

다리에는 시체들로 가득했다.

조인승 씨(경상남도 거창출신 1902-1984)는 1923년 1월에 일본으로 건너 왔다. 8월에 도쿄로 가서 9월 1일 간토대진재를 겪게 되었다. 1일 밤 가쓰시카(葛飾)와 스미다(墨田)의 경계에 있는 구 요쓰기(四ツ木)다리 위에서 자경단에게 붙잡혀 다음날 아침 데라시마(寺島)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구 요쓰기다리 위와 데라시마 경찰서에서의 동포학살을 목격했지만 조인승 씨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사진작가 배소,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제공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사진작가 배소,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제공

(9월 1일은 지진으로) 집이 위험하다고 해서 아라카와(荒川) 둑으로 가니까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불이 타 들어 오기에 요쓰기 다리를 건너서 1일 저녁에는 동포 14명과 함께 있었다. 그곳에 소방단원 4명이 와서 밧줄로 우리들을 염주알 꿰듯이 묶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 자리를 뜨지만 밧줄을 끊으면 죽여버리겠다”.

가만히 있으니 밤 8시경 건너편의 아라카와 역(현재 야히로역(八広)) 쪽 둑이 소란스러워졌다. 설마 조선인을 죽이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날 5시경, 소방단원 4명이 다시 와서 데라시마 경찰서로 가기 위해 요쓰기 다리를 건넜다. 그곳에서 3명이 끌려 와서 일반인들에게 뭇매를 맞고 살해당하는 것을 우리들은 옆 눈으로 보면서 다리를 건넜어. 그때 내 발에도 쇠갈고리가 와서 박혔어. 다리는 시체로 가득했지. 둑에도 장작더미가 쌓여 있듯이 여기저기에 시체가 쌓여 있었어. (간토대진재 때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 『風よ鳳仙花の歌をはこべ』)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하잖아. 그렇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단지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것이 고작인 조선인들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전쟁도 아닌데...
(裵昭『写真報告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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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   

                                                           김종수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상임대표)

며칠동안이나 계속된 학살의 바람

조인승의 증언을 담고 있는 [바람이여, 봉선화 노래를 실어 가라]는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이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간토대지진이 발생하던 1일 밤부터 피난민으로 들끓던 구 요쓰기바시 주변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살해되었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다수 있다. 스무 명에서 서른 명의 사람들이 소총이나 칼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살은 며칠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 책에서의 증언 중에는 “조선인을 10명씩 묶어 세운 뒤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죽지 않은 사람은 선로 위에 늘어놓고 석유를 부어 태웠다.”

도쿄지역에서의 학살 특히 아라가와에서의 학살은 늘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회 대표가 맡는다. 1923한국조사활동에 증언하는 그는 80년 대 초 대학생시절부터 이 사건을 조사하고 증언해 왔다. (사진은 2009년) 
도쿄지역에서의 학살 특히 아라가와에서의 학살은 늘 니시자키 마사오 봉선화회 대표가 맡는다. 1923한국조사활동에 증언하는 그는 80년 대 초 대학생시절부터 이 사건을 조사하고 증언해 왔다. (사진은 2009년) 

 

도쿄 아라카와의 학살상황을 조사하는 2013년 간토학살민간조사단
도쿄 아라카와의 학살상황을 조사하는 2013년 간토학살민간조사단

“9월3일 낮이었다. 다리 아래에 조선인 몇명을 묶어 끌고 와서 자경단원들이 일본도로 베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다. 임신해서 배가 크게 부른 여자도 찔러 죽였다. 내가 본 것으로는 30여명이 이렇게 죽었다.”

기억이 재생될수록 피해자들에겐 고통스런 트라우마 

조인승은 학살의 기억이 꿈 속에서 재생될 때마다 발작을 일으키곤 하였다.  요쓰기 다리 위에 함석으로 덮어씌어 놓은 동포들의 시신은 조인승과 같이 살아남은 피해자들과 잔인한 일본의 군대, 경찰, 자경단의 학살행위를 목격한 이들의 꿈 속에서 끔찍하고 공포스럽게 재생되었다. 많은 사함들이 해마다 추도의 9월이 시작되면 저마다 향을 태우고 토오바에 사죄의 마음을 담고, 물을 담아와 추도비를 씻으며, 자신들을 향한 원망도 씻어줄 것을 바라며 추모의 행렬을 뒤따른다. 1923년 당시의 목격자들과 살아남은 동포들에게는 모두 크두 크고 작은 학살의 상흔과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움으로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간토학살피해자들을 찾아 추모의 행렬은 두 시간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2019년)
간토학살피해자들을 찾아 추모의 행렬은 두 시간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2019년)
간토학살피해자들을 찾아 추모의 행렬은 두 시간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간토학살피해자들을 찾아 추모의 행렬은 두 시간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생생한 기억이 전승될 역사관은 조사활동가들의 사무실 뿐 

도쿄에서의 학살의 증거들을 찾아 자료로 만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일은 비영리단체의 대표들에겐 하늘의 소명이고 이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들의 사무실엔 켜켜이 쌓아 놓은 자료들이 수북하다. 책으로 출판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료들도 많이 추려 놓았다. 
1923간토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전승하는 곳은 학살이 일어난 간토지역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도가 지닌 반생명적 전쟁광들의 잔혹함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은, 아베로 대표되는 자민당 독재 아래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학살사건이 일어난지 100년이 되어도 일본에는 이 사건에 대한 사과와 피학살자 유족들을 찾아 배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 1923간토학살역사관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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