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만 없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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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만 없었더라면
  • 김종수
  • 승인 2020.02.2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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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계엄령 시행 후,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자료제공-국가책임을묻는모임
일본 [국가책임을묻는모임] 제공

 일본 정부는 9월 2일에 계엄령을 시행하였고 그 후 점차 그 대상지역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계엄령은 치안 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에 군대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계엄령 하에서 실탄을 장비하고 도쿄에 들어온 것은 지바현에 주둔하고 있던 기병과 중포병 연대였습니다. 그들은 경관, 민중들과 하나가 되어 “조선인 사냥”에 분주히 뛰어다녔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유언비어를 한층 더 사실로 인식시켰습니다. 그리고 배타적인 움직임은 한 순간에 고조되어 갔습니다.
 

松尾章一감수『関東大震災政府陸海軍関係史料Ⅰ』에 수록
松尾章一감수『関東大震災政府陸海軍関係史料Ⅰ』에 수록

[지도설명]

계엄령 시행 당시 경비할당구역을 그려 넣은 지도. 고노에(近衛)사단과 제1사단이 분담.
진재 직후부터 군대는 치안대책을 위해 출동했다.
계엄령은 2일 현재 도쿄 23구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행되었고 3일에는 도쿄 전역과 가나가와현, 4일에는 지바현과 사이타마현으로 확대되었다.

松尾章一감수『関東大震災政府陸海軍関係史料Ⅰ』에 수록
松尾章一감수『関東大震災政府陸海軍関係史料Ⅰ』에 수록

[계엄령의 조문]

이 때의 계엄령은 관련조문 중 일부를 시행하여 집회와 언론의 제한, 검문소의 설치, 가택수색 검사,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물품의 압수 등 군대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계엄령은 진재의 혼란 수습과 치안 유지를 위해 시행되었다고 하나, 학살은 바로 이 계엄령 하에서 자행되었다

자경단.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재향군인​​​​​​​姜徳相・琴秉洞편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에 수록
자경단.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재향군인姜徳相・琴秉洞편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에 수록
제국호텔 앞의 병사와 자경단​​​​​​​​​​​​​​​​​​​​​姜徳相・琴秉洞편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에 수록
제국호텔 앞의 병사와 자경단姜徳相・琴秉洞편 『現代史資料6 関東大震災と朝鮮人』에 수록
학살에 가담한 기병연대가 주둔했던 나라시노(習志野)滝口昭二『目で見る習志野・八千代の100年』에 수록
학살에 가담한 기병연대가 주둔했던 나라시노(習志野)滝口昭二『目で見る習志野・八千代の100年』에 수록

[나라시노(習志野)수용소와 계엄군]

가장 앞쪽에 台자 모양의 땅에 세워져 있는 것이 육군병원, 그 건너편에 13, 14, 15,16연대의 병사(兵舍)가 늘어져 있다. 기병연대의 병사(兵士)였던 엣츄야 리이치(越中谷利一)는 실탄 60발을 휴대한 전시 장비로 “敵은 제도(帝都, 도쿄)에 있다”라고 하며 지바카이도(千葉街道)를 말을 타고 달려 갔다고 회상했다.

이상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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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당시 학살당한 6,661인의 유족이 되어주세요. 지금, 바로!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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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을 틈타 일본 정부는 약화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김종수(1923한일재일시민연대 대표)

 

계엄군이 지바의 대로를 달리며 "敵은 帝都에 있다" 고 외치며 말를 타고 달려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본 본토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 나타났다는 것은 누군가 내란이 일으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 군대와 경찰과 언론은 '鮮人-센징'이 일본의 가정과 마을과 산업시설과 천황의 거처를 파괴하고 있으므로 '鮮人-센징'을 잡아 경찰에 넘기거나, 조선인이 반항하여 긴급을 요하는 상황이 되면 그 어떤 행위도 법적으로 보장한다는 의미의 계엄령의 조문을 총리대신의 이름으로 전하고 있었다.  

계엄령 선포의 법적요건이 거짓뉴스에 근거한 것이라면? 

당시에 흉흉했던 風說(유언비어)를 누가 만들어 대중들에게 흘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확인되지 않은 근거없는 風說을 경찰이, 군대가 공식적으로 일본 전역에 확산한 사실은 사료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사실처럼 믿도록 공문서로 보내고, 훈령으로 전국에 타전함으로써 계엄령 선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였으며, 학살의 범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조선인 사냥이 진해되는 동안 언론에서는 조선인들의 천황의 수도에서 강정을 파괴하는 폭력과 강간(윤간), 마을공동체의 파괴하기 위해 '우물에 독'을 풀었다거나, 산업시설에 불을 지르고, 사회주의자와 함께 지진으로 인한 혼란에 편승에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거짓뉴스를 마구 양산하여 내보내고 있었다. 

<계엄령과 학살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짓뉴스를 사실화하는 일본 언론 

정부의 훈령과 신문을 통해 전달되는 언론사의 기사에 대다수 일본인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으며 , 누구라도 적을 잡거나 소탕하기 위해 대량학살을 하여도 이는 애국적 행위라 여겼던 것이다. (사이타마 자경단원의 법적 증언에 관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요코하마감옥을 탈출한 300여 조선인들이 강도와 강간을 일삼고 있다는 거짓뉴스
요코하마감옥을 탈출한 300여 조선인들이 강도와 강간을 일삼고 있다는 거짓뉴스

 

조선인을 비하하는 '센징'이 폭행 및 약탈, 강간
조신인을 비하하는 '센징'이 폭행 및 약탈, 강간

 

 

 

대지진으로 인한 재난으로 수만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유독 조선인들만 재난의 상황도 가볍게 여기며 수백명이 신출귀몰하게 일본 제국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風說-유언비어를 접한 일본인들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국가의 훈령과 언론의 사실적 보도는 풍설이 아닌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결국은 거짓뉴스가 학살의 원인이 아니라, 거짓뉴스를 공공연한 '실제적 사건'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를 근거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본인들이라면 누구나 조선인을 죽이는 행위가 애국적 행위로 믿게 하였으며, 어떠한 형태의 살인도 법적으로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 믿게 만든 것은 바로 제국헌법 14조에 의거 천황만이 선포할 수 있는 '계엄령'이었다.

​​​​​​​계엄령만 없었더라면 

재일사학자 강덕상 선생이 강조한 바와 같이 '계엄령만 없었더라면' 6천여 명의 조선인을 단 며칠사이에 전시도 아닌 재난으로 인한 고통스런 현장에서 학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유언비어가 학살의 원인이라고 기술한 모든 역사기록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김종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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