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발생과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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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발생과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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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7.0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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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군대, 민중이 확산시킨 유언비어

 

지진발생과 조선인들에 대한 공포 - 경찰, 군대, 민중이 확산시킨 유언비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사가미만(相模灣)에서 진도 7.9의 지진이 일어났 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간토(関東)지역 에서 광범위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건물의 붕괴나 화재 등으로 인한 사상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10만 5천명에 달했습니다.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横浜)에서는 지진 직후 ‘조선인들이 불을 지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습니 다. 그리고 유언비어의 확대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경찰, 행정 등을 관할하던 내무성이었습니다. 내무성은 2일 오후 해군 무선송신소에 전령을 보내, 조선인들이 ‘불령(不逞)’한 짓을 하고 있다는 내용 을 이튿날 전국으로 타전하게 했습니다. 사이타마(埼玉)에서도 관할 행정구역에 조선인들을 경계하도 록 지시하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선전하여 각 지역에 자경단이 조직되었던 것입니다.

 

학살은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横浜)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정부는 9월 2일부터 계엄령을 시행하였습니다. 본래 계엄령은 ‘전시(戰時)’상태에서 치안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계엄령을 시행했다는 것은 정부가 당시의 상황을 ‘전시(戰時)’로 보았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계엄령은 치안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에 군대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계엄령 하에서 실탄을 장비 하고 도쿄에 들어온 것은 지바현에 주둔하고 있던 기병과 중포병 연대였습니다. 그들은 경관, 민중 들과 하나가 되어 ‘조선인 사냥’에 분주히 뛰어다녔습니다. 이 때의 계엄령은 집회와 언론의 제한, 검문소의 설치, 가택수색 검사,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물품의 압수 등 군대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살은 바로 강력한 계엄령 아래 서 자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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