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사학자 故강덕상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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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사학자 故강덕상 선생을 기리며
  • 미디어기평 기자
  • 승인 2021.09.2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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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연구주제로 삼지 않던 간토학살사건을 평생연구하여 방대한 연구업적이 이루신 故강덕상선생

일본정부 뿐 아니라 한국정부에서조차 외면당해 온 간토학살사건의 진상조사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에 뫃국 정부가 나서지 않은 데에 대해 섭섭함으로 감추지 못하셨던 감덕상 선생.

19ㄷ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려나 희망을 품고, 나에게도 조국이 있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하셨는데, 그만 본 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폐안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강덕상교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져갔다. 그리고 건강도 몹시 나빠지기 시작했ㄷ가. 

최근 몇 년간 건강을 회복하는 듯 하셨으나 결국 지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6월 12일 ,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고 강덕상 선생님에 대한 추억-

김광열교수
김광열교수

어제는 나의 대학원시절 첫 번째 지도교수였던 강덕상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소식(향년 90세)을 듣고 하루종일 가슴이 먹먹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다만 1990년대 전반에 토쿄(東京)의 히토츠바시(一橋)대학대학원 사회학연구과 동양사회사과정에서 강 선생님과 함께 했던 여러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쿠니타치(国立)시에서의 생활 기억과 함께).

히토츠바시대학에서는 1989년에 ‘조선근대사’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되었는데(칸토지방 국립대학 중에서 유일한 강좌였음) 그 담당교수로서 강덕상 선생님이 채용되었다(재일동포 최초의 일본 국립대 교수). 당시 늦깍이 학생이었던 나는 강 선생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1990년도 1학기에 히토츠바시 대학원에 입학했다. 강 선생님이 히토츠바시대학 부임 후 처음 맡은 입시전형에서 만난 학생 중 한명이 되었고, 5년 동안 지도교수가 되어 주셨다. 단 히토츠바시대학원생은 해당 과정에서 반드시 2개의 세미나 학점을 취득해야 하므로 강덕상 세미나를 메인(主)으로 듣고,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세미나(일본근대사, 군사사)를 서브(副)로 수강했었다.

내가 처음 강덕상 세미나에 들어갔을 때에는 일본 학생보다 한국 유학생 수가 더 많았다. 그 대부분은 강선생님이 부임하기 전에 이미 사회학연구과를 비롯한 기타 연구과에 재학하고 있던 한국 학생들이었는데 강세미나를 서브로 수강했었다. 강 선생님의 학부생 세미나도 히토츠바시 사회학부의 세미나 중에서 인원수가 가장 많았었다. 대학원 강덕상 세미나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아태 전쟁기 조선인학도병 관련자료 정리 작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등의 서한문 윤독, 세미나 합숙여행, 그리고 ‘이씨 페밀리’이다. 그 중에서 학도병자료작업의 결과는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朝鮮人学徒出陣>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마지막의 ‘이씨 페밀리’란 당시 강덕상 세미나에 있었던 이씨 형제 3명을 의미한다(사회언어학전공 쪽에 여형제가 1명 더 있었음).

강덕상 선생님은 나의 박사과정 2년차에 히토츠바시대학을 정년 퇴직한 후, 시가(滋賀)현립대학에서 7년 정도 더 재직하셨다. 시가현립대 재직 중에는 타계하신 박경식 선생님의 소장자료가 그 학교 도서관으로 들어가도록 다리를 놓아 주셨다(강선생님의 소장자료는 어떻게 될지).

강 선생님은 지난 2016년부터 일종의 암에 해당하는 악성 림프종을 앓으셨다. 그 해 여름에 도쿄의 자택에서 만났을 때에는 정말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 해 후반에 내가 <여운형평전2>의 번역작업을 무리해서 스피드를 냈던 이유였다. 이후 병세는 호전과 악화를 되풀이했는데, 그런 와중에도 <여운형평전> 3,4권을 정리 출판하시는 집념을 보이셨다. 그리고 어제 6월 12일 아침에 입원중이던 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강덕상 선생님, 그동안 주신 많은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이젠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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