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路를 향해 우리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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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路를 향해 우리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 김종수
  • 승인 2020.11.13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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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의 시민참여분과 회원들은 천안민주로드를 만들기 위해 한국사회가 걸어 온 민주路를 찾아갔다. 가면서 묻는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에서 시민들은 길에서 구호를 외쳤고, 길에서 최루가스를 마셨고, 눈물과 피를 흘렸고, 또 길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 길을 걷던 사람들은, 우리들은 어디로 갔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또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 노동과 세계 윤성희 기자  2012.08.28 14:08
▲ 노동과 세계 윤성희 기자  2012.08.28 14:08

2012년 박근혜 후보는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동자 단체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22명의 노동자가 죽은 쌍용자동차 대한문 분향소는 찾지 않으면서 여긴 왜 왔느냐는 항의였다.

경향신문 권도현 기자
경향신문 권도현 기자

202010, 전태일 동상 앞에서 김진숙 해고노동자는 35년전,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이 만나, 각자가 걸어왔던 민주화의 길, 그리고 민주사회를 향해 걸었던 여정을 노고하고 위로하였다.

출처 https://www.flickriver.com/photos/tfurban/24554647856/
출처 https://www.flickriver.com/photos/tfurban/24554647856/
2020년 10월 23일 한겨레 그림판, 권범철 기자님의 만평
2020년 10월 23일 한겨레 그림판, 권범철 기자님의 만평

함께 투쟁했던 이들 중에 누구는 여의도로, 누구는 청와대로 가 있는데, 누구는 35년 째 해고노동자로 복직투쟁을 하고 있고, 왜 이 시대 전태일들은 여전히 죽음이 위협하는 노동현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천안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는 노동자로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고, 또 어린 여공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랬던 노동자 전태일을 주목하며 그가 온 생을 바쳤던 70년대 청계천을 향해 민주로드로 향했다.

전태일 기념관은 전태일의 생애와 노동운동을 다루는 상설전시 뿐 아니라 오늘날 노동의 문제를 고민해보는 다양한 기획전시 및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70년대의 노동자와 2020년대의 노동현실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울 평화시장은 이북출신 상인들이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평화시장이 계속 번성해가면서 통일상가, 동화상가로 커져갔고, 옆 마을 창신동에 봉제산업이 번성하였다.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은 실과 바늘이 천을 이어 옷을 완성하듯, 서로를 잇고 소통이 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봉제로 이어온 역사, 이 곳에서는 여전히 노동자가 주인되는 꿈을 피우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이 건물은 1961년 미국의 원조로, 미국의 설계사와 시공사가 지은 주한 미대사관과 쌍둥이 건물로 세워졌다. 대한민국 역사는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역사들만 가득하였다.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서 눈물과 땀과 피를 흘렸던 이들의 역사는 한구석으로 몰려 있었다. 혹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과 주한미대사관은 광화문의 역사를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번째 여행은 80년대 민주로드로 갔다.

권력은 부패할수록 폭력적이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검찰 권력의 반인권적 고문수사는 민주사회로 나아갈 때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장애물이었다.

고문수사로 목숨을 잃은 김종철을 보내자마자, 경찰을 통한 국가폭력으로 또 한 명의 대학생 이한열을 민주의 길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그 때 그 곁에 있던 대학생들의 일부는 지금 권력의 한복판에 있다.

876월 민주화의 길에서 시민들을 품어주던 명동성당, 성공회교회, 향린교회들이 있었는데, 지금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여전히 민주로드를 걷고 있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을까?

우리들은 세 번째 여행으로 천안의 민주로드를 찾아나섰다. 천안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최루가스를 마시고, 눈물과 피를 흘리고, 만세를 불렀던 길을, 그리고 그 때 그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

천안농고 축산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했던 청년 오한섭, 그는 새마을 운동본부의 쇠고기 수입으로 소값이 폭락하자, 863월 음독 자살하였다. 한 달 뒤, 천안 오룡동 성당에서 150명의 모여 청년농부 오한섭 죽음을 추모하며, 농업정책을 규탄하였다.

농민들의 분노는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되었고, 가톨릭농민회활동에 기독교NCC가 연대했고, 87년 국본 성립과정에서 학생운동 세력이 결합하며. 그 해 6월에는 천안역에 5,000여 명이 집결, 시국 토론회가 열렸다. 우린 그 길을 걸었다.

6,26국민대회에서는 신부·목사 100여명은 성화동 성당에서, 그리고 결집한 학생시민 3,000여명은 조흥은행 세무서 앞 중앙시장 국민은행 중소기업은행 앞으로 행진했던 기록을 보며 길을 걸었다.

88.05.30. 단국대생 최덕수는 876월항쟁 이후에 민주적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자 광주 영령께 큰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 뜨거운 마음으로 반동 세력과의 계속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가자고 자기 남은 생을 불살랐다.

 

우리는 천안의 민주광장, 이 곳에 임종국 선생 비와 6월항쟁 기념비와 위안부소녀상에 길게 머물렀다.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던 천안 시민들은 이 광장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천안의 민주로드를 만들자는 의미는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자는 것이고, 죽은 자들의 인권을 회복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자들만이 내일의 역사를 지금 여기에서 몸으로 써가는 주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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